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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정부 책임자인 많은 영의정들중에 특히 대표적인 업적이 있는 영의정 황희 류성룡 이원익 채제공의 생애와 그 들의 정치적 업적을 간단히 알아보자.
1.황희
최근 광화문 옆에 그 터가 발굴된 의정부의 책임자는 영의정이었다. 의정부에서 근무한 조선의 영의정 중에서 최고의 인물 3명을 꼽으라면 필자는 지금도 ‘대표 정승’으로 인식되는 황희(黃喜:1363~1452), 임진왜란 때 전시(戰時) 정부를 이끌어 나갔던 류성룡(柳成龍), 그리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각 2차례씩 6번 영의정을 지냈던 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자 한다. 이들 3명의 영의정은 현재의 정치에도 소환하고 싶은 역량과 인품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황희는 90세로 장수하면서 24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고, 이 중 19년은 영의정이었다. 87세에도 영의정을 지낸 것 역시 기록이다.
1418년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하다가 유배의 길을 걷던 황희가 다시 관직에 등용된 것은 세종 때인 1422년 2월이었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황희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조정의 신하들 또한 황희의 등용을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은 황희의 행동이 “충성스럽지 않다고 볼 수 없다.”며 반대파들의 견해를 일축했다. 반대파까지 포용한 세종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세종의 신임을 받은 황희는 1426년 우의정에 이어 1427년 좌의정이 됐다. 1431년 69세의 나이에 영의정에 오른 뒤에도 세종은 늘 그를 곁에 두었다. 1432년 70세가 된 황희가 사직을 청했지만,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황희가 더 연로하자, 세종은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를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고, 큰일 이외에 황희를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명했다. 집에 누워서 대사(大事)를 처리해도 좋다는 지침까지 내렸다. 세종의 파격적인 대우 속에 황희는 87세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할 때까지 18년 간 재상의 자리를 지켰다.
“큰일과 큰 의논을 결정할 적엔 의심나는 것을 고찰함이 실로 시귀(蓍龜:점을 치는데 쓰는 상서로운 풀과 거북)와 같았으며, 좋은 꾀와 좋은 계획이 있을 적엔 왕에게 고함이 항상 약석(藥石:약과 침)보다 먼저 했다. 왕을 과실이 없는 처지에 있기를 기필(期必)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요란하게 하지 않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다.”는 실록의 평가에서 세종이 고령의 황희를 끝까지 신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2. 류성룡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전시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류성룡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의주로 피난을 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놓고 또 골짜기까지 들어간다면 다시는 서울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선조가 피난길을 떠난 후에는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계획했고, 1593년 1월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했다. 1593년 10월 선조를 호가(扈駕)해 환도한 후에는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직업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설치를 청했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수기의십조(戰守其宜十條: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 등을 올리면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전쟁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1598년 9월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이 시기에 임진왜란에 대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했다.
3. 이원익
이원익은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2번씩 영의정을 지냈다. 이원익은 행정력과 실무 능력과 더불어 도덕성과 청렴성을 지닌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최근에도 공직자들의 인사 청문회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원익은 어떤 상황에서도 재상 지명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선조 때인 1598년 7월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승진을 하면서 그의 이력에 첫 번째 영의정 경력을 쌓았다. 1599년 5월 영의정에 물러났다가 9월에 복직했다. 광해군의 즉위와 더불어 북인이 정국의 중심에 섰지만, 광해군의 첫 조각에서 예상을 깨고 이원익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광해군 초반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자 이원익은 1609년 8월 20여 회 이상의 사직을 청한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경험과 노련한 국정 경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두 번째 영의정의 이년은 짧게 끝났다. 여전히 정국은 경색됐고, 이원익은 1612년 4월 스스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 정권 시대가 열렸다. 인조 정권의 첫 영의정도 이원익이었다.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날, “왕이 승지를 보내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던 날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아들였다.”고 『인조실록』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4. 채제공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 남인의 대표적 정치가이자 학자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채응일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 만성의 딸이다. 가문은 남인이었으나,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조상 중에는 효종 대에 대제학을 지낸 채유후가 있지만, 채제공이 성장할 시기 남인은 갑술환국과 무신란 등으로 정치적 불이익을 겪고 있었다. 채제공은 남인 문장가 강박과 오광운 등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했고, 특히 오광운의 형 오필운의 딸과 혼인하여 남인 계열의 결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735년 향시에 급제하고, 1743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채제공은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남인들이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탓에 채제공도 요직에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스승 오광운이 세상을 떠난 뒤 영조의 눈에 띄어 탕평책의 대표적 인재로 발탁된다. 영조는 환로를 넓히기 위해 한림 추천 제도를 개정했고, 이를 통해 채제공은 청요직에 진출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후 그는 다양한 청요직과 지방 관직을 거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1751년에는 중인들과의 갈등으로 삼척에 유배되기도 했고, 이후 지방 관직에서 민생 개선을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부패 관리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의 신임을 잃지 않고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채제공은 영조의 최측근에서 문서 편찬과 정책 자문을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70년 병조판서에 임명된 후에도 여러 요직을 맡아 국가 재정 운영과 군사 문제, 인사 관리에 기여했다. 특히 서얼 통청 문제와 관련해 경상도의 사족들을 두둔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탕평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그는 함경도와 평안도의 감사로 재임할 때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정조 즉위 후,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로서 정조의 개혁 정치에 협력하며 더욱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영조의 국장과 관련된 여러 사업을 주관했고, 사도세자와 관련된 정치적 갈등에서 옥사를 처리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후 예조판서, 병조판서, 규장각 제학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정조 대의 개혁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1788년 정조가 친필로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하면서 남인 정치세력의 재건을 이끌었다. 그는 영남 남인들의 사적을 기록한 『창의록』을 인쇄하고, 영남 남인들이 다시 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88년(정조 12년) 2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90년(정조 14년)에는 좌의정,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채제공은 정치뿐 아니라 학문과 문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남인 학맥을 계승하며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정통성을 주장했다. 또한 문장가로도 유명하여, 특히 소(疏)와 차(箚)를 잘 지었다. 남인 문인들과 함께 시회를 열어 학문적, 문학적 교류를 이어갔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오랫동안 남인들의 결속을 다지는 데 힘썼으며, 이러한 노력이 남인들의 정계 재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그룹 중 일부가 서학에 기울면서 남인 내부에 균열이 생겼고, 이는 채제공이 사후 정치적으로 공격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채제공은 1799년 사망하였고, 정조는 그를 두고 "불세출의 인물"이라 칭송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남인의 정치적 영수로서 조선 후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문집 『번암집』은 남인 지식인들의 활동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의 후손과 문인들은 순조 대에 이르러 정치적 축출을 당했으나, 그의 학문과 업적은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맺음말
정파 간 대립이 날로 치열하고, 이념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치 현실 때문일까? 이원익처럼 국익과 민생 문제 해결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영의정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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