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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만세를 외친 4.19 혁명에 대한 역사 수행평가 자료입니다.


1960년 4윌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어. 이로써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우고 12년 동안 집권해 온 이승만은 국민의 힘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불행한 지도자가 되었지.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이 사건을 우리는 ‘4.19 혁명'이라고 부른단다.


1. 무제한 대통령을 추구한 이승만


우리나라는 현재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고,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야. 그것도 단 한 번만 대통령이 될 수 있어. 우리가 이런 제도를 택한 이유는 지난 시절 장기 집권하며 독재를 일삼은 대통령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서란다.

현재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한번 더 할 수 있게 하고 있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세 번까지 허락하는 나라는 거의 없지. 이런 제도를 누가 만들었는지 아니? 바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란다.

 


북아메리카에는 17세기부터 영국 사람들이 건너가 살았는데, 곧이어 그곳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이주민들은 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였어.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는 조지 워싱턴이었어. 그들은 드디어 영국과 독립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독립 국가 미국을 세웠어. 그리고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단다.

워싱턴은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연달아 두 번 역임했어. 세 번째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도 미국 국민들은 워싱턴이 계속 대통령직을 맡아 주기를 바랐지. 그때는 대통령을 몇 번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었거든.

 


그러나 워싱턴은 대통령을 더는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물러났어. 한 사람이 오랫동안 정권을 잡으면 독재를 하게 되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지. 이후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워싱턴을 본보기 삼아 대부분 대통령 직을 두 번까지만 맡는 것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두게 되었단다. 물론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정작 미국 땅에서 살며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은 워싱턴을 본받지 않았어.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를 통해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 그런데 두 번째 선거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아 줄 것 같지 않자 헌법을 바꾸어서 국민들이 직접 뽑게 했어. 그래서 2대 대통령이 되었어. 이승만은 다음번에도 또 헌법을 바꾸어 초대대통령인 자신만은 무제한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서 결국 3대 대통령까지 되었지.

 

 

이때부터 국민들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과 독재를 걱정하기 시작했어.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라는 후보에게 적지 않은 표를 내준 것이 그 증거였지. 그러자 이승만은 조봉암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사형시켜 버렸어.

그리고 1960년 네 번째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어. 이제 국민들은 이승만의 집권을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어. 하지만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세력은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뭐겠니? 옳지 않은 방법으로 선거를 조작하는 것 밖에 없었지.


2. 국민을 얕본 부정선거

 

이승만 정부는 부정 선거를 지휘할 부서로 내무부를 선택했어. 내무부가 전국의 도, 시. 군. 구, 읍. 면. 동으로 이어지는 각급 행정 조직을 총괄하고 있으니, 그 공무원 조직을 곧바로 선거 운동 조직으로 활용하겠다는 발상이었지. 더구나 내무부는 경찰까지 지휘했기 때문에 경찰이 부정 선거를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먼저 전국의 동네마다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고, 관할 경찰서와 각 관공서의 주도로 공무원들을 매주 한 번씩 모이게 하여 체계적으로 부정 선거를 지시했어.

 


먼저 4할 사전 투표라는 게 있었어. 선거 당일 개인 사정으로 기권할 것이 확실한 표, 돈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표, 선거인 명부에 미리 허위로 기재해서 만들어 둔 표 등을 합해 해당 지역 유권자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를 확보한 다음, 미리 이승만 이름 밑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여 투표함에 넣어 두는 거야. 이는 공무원들이 투표함을 관리했기 때문에 쉬운 일이었지. 

사전 투표가 뜻대로 안 될 때는 투표함을 수송하는 도중에 4할 사전 투표를 해 둔 투표함과 바꾸게 했어. 그것도 안 되면 투표가 끝나고 개표할 때 개표 요원들이 다른 후보의 표를 이승만 표로 바꿔치기하는 방안까지 마련해 두었지.

 


그래도 이승만 정부는 안심할 수 없었어.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란다. 이승만을 찍도록 미리 짜 놓은 유권자를 조장으로 삼아서 3명이나 5명으로 조를 꾸린 뒤, 각 조장이 자기 조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용지에 이승만을 찍었는지 아닌지 확인한 다음 투표함에 넣게 하는 방법이야. 많은 선량한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이러한 불법적인 공개 투표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단다.

심지어 완장 부대라는 것도 있었어. 이승만 쪽 유권자들에게 ‘자유당'이라고 적은 완장을 두르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만들게 했어. 일제 강점기와 6. 25 전쟁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완장을 찬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거든. 유권자들이 이승만에게 투표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전술이었지.


3. 민주주의의 불길이 타오르다


이승만 정부는 이렇게 부정 선거를 준비하는 한편으로, 어떻게 해서든 국민들의 눈이 야당 후보에게 쏠리지 못하게 했어. 그 가운데 하나가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었어.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야당인 민주당이 수성천변에서 대규모 군중을 불러 모아 선거유세를 할 예정이었지.

이날 유세할 사람은 부통령 후보 장면이었어.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부통령만은 야당 후보를 뽑아야겠다는 여론이 일고 있었어. 지난 선거에서 신익희 후보가 유세 기간에 갑자기 쓰러져 죽은 데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2월 15일 병으로 사망했거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잇달아 선거 운동 중에 죽으니까 국민들의 동정심이 민주당으로 향했던 거야. 특히 젊은 층이 민주당의 지지세력이 되고 있었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대구 시민들이 이날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았어. 심지어는 일요일인데도 고등학생들을 등교시켜 유세장에 못 가게 했단다. 하지만 이러한 꼼수를 학생들이 모를 리 없었지. 강제로 등교한 학생들은 일요일에 등교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학교에 따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고 외치면서 시내 중심가로 향했지.
이후 3월 15일 선거 일이 될 때까지 서울, 대전, 부산, 수원 등 전국의 도시로 시위가 번져 나갔어. 이승만 정부가 부정 선거를 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는 감출 수 있는 비밀이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짜놓은 각본대로 부정 선거를 치렀어. 그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지. 국민들은 이러한 선거 결과가 수많은 부정으로 얻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민주당의 지역 조직들도 이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라는 것을 깨닫고 투표일 당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투표 거부를 선언하고 시위에 들어갔어.

그 가운데 마산시도 포함돼 있었어. 투표일 아침 민주당 마산시 지부가 투표 거부를 선언하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부정 선거 다시 하라!"라고 외쳤어. 경찰이 출동해 시위를 막아 보려 했지만 성난 군중을 막을 수는 없었지. 결국 경찰이 총을 쏘며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나오기에 이르렀어.



마산 사태 소식이 전국에 퍼지면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는 더욱 늘어났어. 그러던 중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참혹한 시체 한 구가 떠올랐어. 이제 막 마산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세 소년 김주열의 시체였어. 그의 왼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죽은 그를 경찰이 숨기기 위해 바다에 던져 버렸던 거야.

김주열은 참혹하게 죽었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살렸어.
김주열의 시신을 본 국민들은 더는 이승만 정부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지. 전국에서 "이승만은 물러가라!"라고 외치는 시위가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어.



시위 열기는 수도 서울을 휘감았어. 4월 19일에는 대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섰고,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어. 시위대는 대통령이 머무는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로 향했지. 경무대를 지키던 경찰과 군인들의 총격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졌지만 시위 대열은 멈추지 않았어.

이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상체제에 들어갔지만 사태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이승만도 국민의 분노가 엄청난 것을 보고 이제는 대통령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2년에 걸친 이승만의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지.



지난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조선 왕조가 몰락한 뒤 제 힘으로 근대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어. 그리고 35년 만에 비로소 해방을 맞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독립국가를 세우기도 전에 좌우로 나뉘어 싸우다가 분단이 되고, 심지어 수백만 명이 죽고 다치는 전쟁까지 겪었지. 그런 고난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이제나저제나 민주주의를 고대해 왔어.

4.19 혁명은 그러한 소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대폭발이었어. 이승만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가 한사코 민주주의를 거스름으로써 오히려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더욱 뜨겁게 달구어 주었던 셈이지. 참 모순된 것 같지?
역사란 본디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지도 모른단다.

 

4.19 민주 묘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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