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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행평가용

(고려사) 4. 어지러운 고려 말기(1)

교육전문가집단 2023. 12. 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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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대부들의 욕심
2.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
3. 왜구와 홍건적
4. 요란스러운 신돈
5. 제국대장공주와 공민왕
6. 공민왕의 비참한 최후


1. 사대부들의 욕심



고려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서도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고,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일찍부터 존재해 온 귀족들의 개인 토지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오면서 개인 토지가 더욱 성행하였다. 이를 농장이라고 하였다.


농장의 경작은 전호나 노비가 담당하였다. 따라서 이들 경작자는 서양 중세의 농노와 비슷한 농장의 증대는 국가 재정을 고갈하게 했고, 그 결과로 관리의 녹봉이 폐지되었다.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 사대부 관리들은 권문세가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다.


무인정권으로 말미암아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로 고려는 정치적 대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았다.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여 북방으로 쫓겨 가고 주원장의 명나라가 건국되었다. 정권 교체기에 즉위한 제31대 공민왕은 반원 정치와 권문세가의 억압이 라는 두 가지 개혁 정책을 내세웠다. 반원 운동을 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신돈은 이공수 등 권문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권문세가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1374년 권신 이인임이 열 살 된 어린 우왕을 옹립한 뒤 권력은 다시 권문세가의 손에 들어갔다. 이인임 일파는 신흥 사대부들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토지겸병을 자행하였다. 토지겸병은 여러 토지를 하나로 묶어 차지하는 일이었다.


반원 정책도 수정되어,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등거리 외교가 전개되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해 권력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신흥 사대부들과 권문세가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 등을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개인 토지인 사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을 제33대 창왕으로 삼았다. 1년 뒤인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창왕마저 폐위하고 제34대 공양왕을 옹립하고,정치권력을 완전 장악하였다.


사전 개혁도 본격화하여 전국 토지에 대한 측량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완료하고, 종래의  공사전 토지문서를 모두 불태워 폐기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수립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와 사상 등 모든 면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개혁을 확대하였다

 


2.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



1388년 우왕14년 음력 1월에는 토지겸병으로 악명 높은 권문세가인 이인임 일당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최영이 우왕과 상의하여 집행하였다. 이로써 권문세가의 기세가 꺾이고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신흥 사대부 간에는 틈이 생겼다.

 

같은 해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쌍성총관부 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압적인 통보를 해오자, 최영은 북으로 밀려난 원나라에 명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명나라의 동북 방면 전진기지인 요동에 대한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군사적으로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배극렴, 조민수와 함께 원정군 4만명을 이끌고 출병한 이성계는 마침 장마가 시작되자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 머물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때 장수들이 여러 가지로 이롭지 않다며 돌아갈 것을 제안하였다. 작은 나라 고려가  큰 나라 명나라를 섬겨야 안전하고, 장마철에 전쟁을 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것이다. 지휘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88년 군사를 개경으로 되돌려 내려와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한다.

 

최영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와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유배당한 뒤 처형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끝난 것이다.


3. 왜구와 홍건적



제31대 공민왕이 시해되고 어린 왕 우왕이 등극한 뒤 정치기강이 문란해졌다. 그틈에 바다에서는 왜구가 노략질을 하고 육지에서는 홍건적이 침공하여 고려 사회는 더욱 어려워졌다. 우왕 초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14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창궐하게 된 왜구를 격퇴하는 문제였다.


왜구는 도처에서 잔혹하게 노략질을 하여 세곡 수송선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일본 막부에 왜구의 노략질을 근절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내란에 처한 바쿠후가 지방을 통제하지 못해 별 성과가 없었다.


제31대 공민왕은 처음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벼슬이 높은 권문세가들은 하급 군인들의 경작권을 빼앗았고 군량미 지급을 위해 마련한 둔전의 양곡을 마음대로 나눠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의 노비나 양민을 빼앗아 자신의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사찰도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탈세를 일삼았다. 부호들은 이권을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공전이 축소되어 나라의 창고는 텅텅 비었으며 백성들은 굶주림에 빠졌다. 외부의 침입은 더욱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 중국 남쪽에서는 주원장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황하에서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이 홍건적이다.


자주의식이 투철한 공민왕은 실리외교를 펼쳤다. 먼저 온갖 횡포를 부리는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원나라가 인사권에 개입하는 정방 기구를 없애 버렸다. 중국 남쪽 세력과도 외교 관계를 트고 미래의 사태를 대비했다. 이때 세력이 커진 홍건적이 1361년 개경을 침공해 왔다.


4. 요란스러운 신돈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경상도 안동으로 피했다. 그때 만난 중이 바로 편조(신돈)이다.그는 여자 종의 몸에서 태어나 스님이 되었다. 공민왕을 만나 왕의 신임을 얻어 정치와 종교의 대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개경으로 돌아온 공민왕은 편조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설법을 듣고 국정을 자문하기도  했다. 공민왕은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외부의 환난에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권문세가와 신진 관료, 유생들을 믿지 않았다. 모두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 또는 영합하는 부류로 보았다.


왕은 마침내 편조에게 모든 개혁의 짐을 맡겼다. 공민왕과 편조 두 사람은 부처님과 하늘에 맹세하는 결의를 다졌다. 그 뒤 편조는 스님이면서도 머리를 길렀다. 조정에 나올 때마다 관복을 입었다. 사람들은 속세를 떠난 스님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신돈으로 바꾸었다.


신돈은 개혁에 저항하는기득권 세력들인 권문세가, 고위 벼슬아치와 유생 출신 관료들을 몰아냈다.
1366년 신돈은 마침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농장에 부당하게 탈취당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사전의 탈세를 막고 고리대를 제한하며 양민을 농노로 예속하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신돈은 시행령을 반포하고,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을 기한으로 정해 자진 신고하도록 하였다.
"잘못을 스스로 고치는 자는 불문에 부쳐 용서할 것이나, 기일을 어겨 발각되면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겠다. 망령되이(스스로를 높이고 크다고 여기며 모욕되게 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것)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반역자로 처벌한다."


이에 따라 농장주들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고, 강제로 농노가되었던 양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찾았다.
신돈이 거처하는 집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신돈에게 직접 찾아와 양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신돈은 이들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노비들이 낮은 무관의 자리에 진출하기도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부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성 연복사에서 법회를 열 때의 일이다. 신돈은 설법을 하다가 부녀자들이 법당 밖에서  설법을 듣는 모습을 새삼스레 주목했다.
그는 공민왕에게 "부녀자들에게 법당 안으로 들어와 설법을 듣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오랜 관습을 깨뜨리는 요청이었다. 신돈은 부녀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부녀자들은 "첨의께서는 문수보살의 후신이시다!", "큰 스님이 나타나셨다."며 신돈을 치켜세웠다. 그 말에 노비들과 양인들도 따랐다.


신돈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도 동조했다. 유교세력의 동조를 얻기 위해 신진의 유학자를 발탁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에 등장한 인물이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이었다.


그러자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원나라 조정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을 갖가지로 방해했다.
종래 파벌을 조성하는 유생 출신의 관료들을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라고 배척했다. 또  과거제의 특혜를 없애고 오직 정식 과거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나오게 했다.


과거제 개정은 기득권 세력의 팔다리를 자르는 조치였다. 이 제도를 도입해 종래 어진  이를 요직에 맡긴다는 명분으로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시켜 온 관례를 막았다. 기득권 세력은 이 제도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동료나 자제들을 끌어 주었던 것이다.


훼방꾼들은 "옥과 돌이 섞이고 향기와 구린내의 분별이 사라졌다"고 비난했다.
6년에 걸친 개혁 작업은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비리를 공격하는 탄핵 상소가 잇달았다. 그러나 공민왕의 강력한 비호로 번번이 무마되었다.


신돈을 비난하는 글은 토지, 노비와 과거제 등 개혁조치는 별로 언급치 않고 개인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신돈을 비방하는 구실은 스님이 아내를 두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 뇌물을 받아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는 것, 역적모의를 했다는 것 따위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처음에는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가 역모를 구실 삼아 그의 세력 20여 명과 함께 처형했다.


5. 제국대장공주와 공민왕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사랑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본래 제국대장공주는 중국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의 딸이었다. 공민왕과는 원 나라에서 만나 1349년 결혼하고 1351년

12월에 두 사람은 함께 고려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이가 없었다. 열심히 불공을 드린 끝에 1365년 아이를 갖지만 난산으로 인하여 제국대장공주가 죽었다. 이에 제국대장공주를 너무나 사랑한 공민왕은 국사도 제대로 돌보지 아니하고시름에 빠져 살았다. 공민왕은 손수 제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그려 밤낮으로 바라보며 울었다.


공민왕은 슬픔을 잊고자 요승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공민왕은 영원한 사랑인 제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뒤 여자를 멀리했다. 신하들이 왕비를 새로 들였으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후궁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아들을 두지 못했다.


신돈은 자신의 시종이자 어여쁜 반야를 ‘씨받이'로 선택하여 공민왕의 잠자리를 돌보게 했다. 그때 만난 반야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 반야가 아들을 낳았다. 공민왕은 아들 이름을 ‘모니노'라 하면서 애지중지했다. 그가 공민왕의 다음왕인 제32대 우왕이다.



6. 공민왕의 비참한 최후



공민왕은 모니노를 원자로 책정했다. 이때까지도 별탈을 잡히지 않았다. 어느 날 김흥경이 임금에게 말했다.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들 가운데 미소년들을 뽑아 궁중에서 살게 하라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구를 만들어 여자 궁녀 대신에 잘생긴 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했다. 자제위 소년들에게는 상과 벌도 마음대로 내렸다. 소년들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서로 싸움을 벌이고 질투했으며 폭행을 당하고 휴가를 얻지 못해  불만도 쌓였다.


공민왕은 어느 날 술에 취해 침실에 누워 있었다. 자제위 소속 청소년 예닐곱 명이 들어와 공민왕을 칼로 난자했다. 왕은 개혁의 뜻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도 45세의 장년으로 생을 마쳤다.


결국 공민왕은 개혁 노력을 기울였으나 헛수고에 그쳤다. 공민왕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나서 변태적인 남색을 탐하는 등 타락의 생활을 하다가 남색패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그의 사후는 더욱 비참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공민왕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뒤 그의  아들 모니노를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려 제32대 우왕으로 왕좌에 앉혔다. 그리고 최영, 정몽주 등을 몰아내고 공민왕의 사업을 모조리 뒤집는 역사 왜곡 작업을 벌였다.


 그와 함께 우왕이 요사스런 중 신돈의 자식이라는 조작을 만들어 냈다. 신돈이 반야를  간통하여 자식을 낳고 공민왕의 아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왕을 왕씨 혈통이 아니라 중의 아들이라면서 마침내 쫓아냈다. 이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제 33대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때에도 신씨 혈통이라는 논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명망있는 이색, 조민수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창왕도 재위 9년 만에 쫓겨났다. 공민왕과 그 뒤의 왕들은 하나같이 철저하게 이미지가 구겨진 조작의 이용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려사) 1. 왕건의 고려 건국, 숭불정책, 거란, 여진과 대결, 서희, 강감찬, 윤관의 활약

(고려사) 2. 이자겸, 묘청, 무신정변, 만적의 난까지 반란의 난국

(고려사) 3. 고려와 몽골 (원나라)의 대결

(고려사) 4. 어지러운 고려 말기(1)

(고려사) 5. 어지러운 고려 말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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