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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행평가용

(고려사) 5. 어지러운 고려 말기(2)

교육전문가집단 2023. 12. 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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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몽주의 단심가
2. 두문동 72현의 충절


1. 정몽주의 단심가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문신, 외교관, 정치가, 교육자, 유학자였다. 1338년 1월 13일 출생, 호는 포은, 시호는 문충이다. 야은 길재, 목은 이색과 더불어 '고려 말의 3은'으로 불렸다.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쳤다. 성균관 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고려 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 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과 익양군충의백(盆陽郡忠義伯)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 공양왕 2년 4월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길에 개성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었다. 그의 손녀는 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이 되고, 서손녀는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과온건 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정몽주는 자신의 문하생과 함께 공부한 이색의 문하생들로 하여금 이성계, 정도전 등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게 했다.
1392년 봄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낸 그는 이성계가 병으로 은신한 것에 의문을 품고 사람을 보내 이성계의 주변을 살폈다. 이성계가 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정몽주 역시 병을 핑계로 조용히 있다가 그해 4월 이성계가 병을 빙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이성계의 동태를 살폈다.


1392년 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황주에서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 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초대하였다.


1392년 4월 26일 새벽 그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그날 아침 조상들의 제단 앞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을 불러놓고 새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거절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유언을 남겼다.

"충효를 숭상하는 것이 우리 집의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 마라.”
이 유언을 남긴 뒤 정몽주는 이성계의 정세를 엿보려고 병문안 길에 나섰다. 그러나 이성계는 만나지 못하고 이방원의 환대를 받았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와 (하여가)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충절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을 오늘밤에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 정몽주는 이방원의 태도와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일부 전해 오는 이야기는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하도록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 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들고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 버려라.”라고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고 전한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고 일렀다. 마부는 정몽주가 술에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의연하게 대답하였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악한 자들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몸을 돌려 말을 탄것이다."


마부는 말을 끌려고 하지 않았으나 정몽주는 길을 재촉하였다. 선죽교 중간에 이르렀을 때, 고여, 조평 등 10여 명의 괴한이 나타났다. 정몽주는 이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사람을  공격함을 질책하였으나, 정몽주를 몽둥이와 철편으로 공격하여 죽였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다. 비가 내려도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대나무까지 솟아났다고 하여 본래 이름인선지교 다리를 선죽교로 바꾸어 불렀다. 참고로 선죽교 표지석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후일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1945년까지도 그의 핏자국 흔적이 있었다고 전했다.
1392년 4월 정몽주는 역적으로 단죄되고, 시신은 바로 이방원의 수하들에 의해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려졌다. 그의 시신은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우현보와 송악산 스님들에 의해 수습되어 승려들이 염습한 뒤 개경 풍덕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이성계가 이방원을 꾸짖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우리 집안은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거늘, 네가 대신을 죽였으니 백성들이 무엇이라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불효한 짓을 하였으니 사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라며 책망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문하생 중길재와 이숭인은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는데, 이들은 지방의 유력 인사로  성장하여 후일 사림파의 기원이 되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에 반대하고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으며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부사에 추증(追贈)되고,익양부원군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추증(追贈) : 관료의 사후에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에 관직을 내리는 일.
추봉(追封) : 임금 또는 왕족이 죽은 뒤에 존호(尊號)를 오리던 제도.


2. 두문동 72현의 충절

두문동 72현 사건은 1392년 7월 자신들이 받들던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에게 따를 수  없다며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으로 들어간 맹호성, 서중보, 신순, 조의생 등 충신열사 72명이 불에 타 죽은 사건이다.
이들은 망국의 한을 억누르지 못하고 부조현에서 관복과 조복, 관모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헌 옷으로 갈아입은 뒤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성계는 신하를 보내 이들이 돌아오기를 권했으나 나오지 않자 이들을 포위한 뒤 계속  설득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으나 그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고려의 망국과 함께 은거한 두문동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성계에게 큰 부담으로  돌아왔다. 두문동 72현은 1740년 조선 제21대 영조의 개성 방문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이는 고려 충신의 자취를 찾겠다는 국왕의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풀이되었다.


제22대 정조는 그 자리에 표절사 사당을 세워 72현의 충절을 기렸다. 이에 따라 국왕이 12명의 신하와 함께 두문동의 충신들을 기리는 시를 읊고 비석을 세우며 제사를 지내게  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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