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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왕건의 등장

2. 고려 건국 전야

3. 후삼국 통일

4. 불교를 국교로

5. 거란과 대결

6. 강감찬의 귀주대첩

7. 윤관의 여진 정벌

 

 

 

 

1. 왕건의 등장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王建)이 새로운 왕조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라 하고 송악에 천도하니,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다.

 

왕건은 개성 근처 예성강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하여 용의 후손이라는 말을 들었다.

 

4태사의 건의와 도움으로 임금에 오른 태조 왕건은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새 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신라는 이미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고려와 후백제는 공산(오늘날 대구)과 고창(오늘날 안동)에서 큰 전투를 치렀는데,공산은 왕건의 대패, 고창은 견훤의 대패로 끝났다.

 

그 뒤 후백제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로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 고려 건국 전야

 

왕건의 등장에 이른바 4태사 라는 요인들이 있었다.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홍유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4태사들은 고려 건국을 선포하기 전날 밤 왕건의 집에 모여 궁예로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으니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모사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왕건 휘하에서 궁예의 밑에 있었으나 궁예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왕건에게 거사를 강력하게 건의하여 왕건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태조 왕건은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도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은 뒤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 지위를 확보하고,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 회유하였다. 그런 뒤에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북진정책을 내세워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다.

 

고구려의 옛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평양)개척에 노력하였다. 유금필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하게 하여 영토를 넓혔다.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고 <훈요십조>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는 등 개혁에 힘썼다.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왕건은 법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관리를 등용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993년부터 1019년 사이에 거란과 전쟁을 벌여 거란을 물리쳤다. 그 뒤 1238년 몽골이  침입하면서 30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제31대 공민왕의 자주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이 시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3. 후삼국 통일

 

왕건은 송악을 개경(오늘날의 개성)이라 하고 수도로 삼았다. 고려는 후백제와의 공방 중에 신라를 먼저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신라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제4대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제5대 경종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제6대 성종은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4. 불교를 국교로

 

제11대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동양의 불교 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왕건은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우고 삼국시대부터 발달해 전해 오는 유학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국가 시책에는 불교 및 풍수지리에 많이 의존했다.

 

태조는 불교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가 발전하려면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강조하고 개경에 많은 절을 짓게 하였다. 이 때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흥국사. 개국사, 해주에 송신사, 논산에 개태사 등 20여 개 절이 세워졌다.

 

태조가 강원도 철원에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겨 정한 것도 그렇게 하면 국가가 융성하고 발전한다는 도선 스님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이때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들을 복종시켰다.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5. 거란과 대결

 

고려는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0세기 초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수차례 외교적 충돌이 있었다.

 

처음 거란은 993년 6만 명의 군사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의 영토가 된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함께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고 안융진에서 거란의 공격을 저지하고, 서희가 협상에 나섰다. 이 때 거란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았다.

 

거란은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영토로 인정해 주고, 고려는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거란이 군대를 거둔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거란과는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삼아, 강동6주를 넘겨줄 것을 다시 요구하였다.

 

 

6. 강감찬의 귀주대첩

 

거란 성종은 1010년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에 강조가 직접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통주에서는 대패하면서 개경이 일시 함락되는 난관을 겪었다.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곳곳에서 크게 무찔렀다. 거란은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몰리자 고려와 강화를 자청하고 겨우 물러갔다.

 

고려는 전쟁이 끝난 뒤에 국방을 강화하는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을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막는 방어선으로 삼았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거나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으로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 1차 침입 때에는 서희가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을 꺾고 담판을 벌여 강동6주를 차지하였고, 1010년 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1019년 3차 침입 때는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 고려군이 요나라 군대를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거란과의 세 차례 대결은 이렇다.

 

요는 거란이 세운 나라이다. 거란의 성종이 1010년 40만 대군으로 침공하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강감찬이 대담하게 거란을 물리쳤다. 그뒤 거란은 1018년 12월에 10만 대군으로 다시 침공해 왔다. 이때 강감찬은 압록강유역 흥화진의 삼교천에서 거란군과 맞섰다. 날랜 군사 1만 2000명을 매복시킨 뒤 쇠가죽으로 삼교천 상류를 막고 거란 군대를 기다렸다. 적군은 강물이 거의 빠진 얕은 곳으로 골라 거의 모두 들어서자 쇠가죽 밧줄을 끊어 막혔던 강물을 쏟아냈다.

 

"아악!물벼락이다."

숨어 있던 고려 군사들은 강물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거란 군대를 집중 공격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다음해 거란 군사들은 개성을 향해 또다시 침공해 왔으나 이번에도 강감찬이 앞장서서  방어하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날랜 군사들로 하여금 적들을 추격하게 하고 귀주를 지날 무렵 길목을 막고 집중 공격하였다.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다. 고려군은 반령까지 거란군을 추격하며 거의 전멸시켰다. 겨우 1000여 명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이후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7. 윤관의 여진 정벌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 완옌부의 추장이 다른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충돌에서 패전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15만 명의 별무반을 갖추고 정벌을 준비하였다.

 

1107년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려는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려 조정은 다시금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거란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뒤 1115년 여진족은 힘을 길러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격심한 정치적 분쟁을 겪었다.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신하의 관계를 맺었다.

 

 

 

 

 

(고려사) 1. 왕건의 고려 건국, 숭불정책, 거란, 여진과 대결, 서희, 강감찬, 윤관의 활약

(고려사) 2. 이자겸, 묘청, 무신정변, 만적의 난까지 반란의 난국

(고려사) 3. 고려와 몽골 (원나라)의 대결

(고려사) 4. 어지러운 고려 말기(1)

(고려사) 5. 어지러운 고려 말기(2)

(고려사) 6. 코리아의 명성 - 고려의 발달된 문화와 건축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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