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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라의 삼국 통일의 꿈과 멸망 과정

2. 왕권을 지켜라

3. 호국 불교의 염원

4. 찬란한 문화 유물

5. 최치원의 등장

 

 

1. 신라의 삼국 통일의 꿈과 멸망 과정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손을  맞잡고 권력을 장악한 후 삼국 통일의 꿈을 안고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나. 당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에 반격을 대비하였다.

 

나. 당동맹 이후 백제를 공격하여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이 생겨 국력이 쇠퇴한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그 시기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보였다. 

 

신라는 당나라 20만 대군을 매소성 (오늘날 경기도 연천)에서 격파하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옛 고구려의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나,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여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하였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 북에 발해가 건국, 한반도와 고구려 영토인 만주에 두 나라가 있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는 오직 신라만을 인정, 발해를 없는 것으로 본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반성이 학계에 일어났다. 

 

이는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한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며, 중국의 발해 공격과 일제 식민주의 사학에 의해 강하게 뿌리내려진 탓이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 통일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워 신라인들을 회유하는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고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제56대 경순왕은고려와 후백제의 공세에 국가 보위가 사실상 위태로워지자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자진 항복하여 56 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2. 왕권을 지켜라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한정되어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에 올랐다.

 

제31대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그 뒤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여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켰다.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 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 제도를 확립하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 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이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제46대 문성왕 이후 당나라,일본과 교역이 활발해졌다. 중국 산둥반도와 장쑤성에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고, 신라원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다. 특히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민간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의 출몰이 잦았다. 해상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전남 완도에 청해진을, 경기도 남양에 당성진을, 강화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그 가운데 828년 제42대 흥덕왕 3년에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3. 호국 불교의 염원

 

신라는 통일신라 이후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불교문화에 특징이 있다.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었다.

법흥왕이나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신라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하였다.

 

경주에는 사천왕사. 불국사. 봉덕사 등 대사찰을 세웠고, 지방에는 부석사. 통도사. 화엄사. 범어사. 법주사 등의 대사찰이 들어섰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 의상, 원효, 혜초, 설총 등이 그 대표적이다. 혜초는 인도의 불교사적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원효는 여러 종파의 대립 상생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과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제31대 신문왕 2년(682년) 국학을 설립하고, 제38대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 제도가 실시되었다.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당나라 유학생이 증가되고, 강수, 설총, 김대문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수학과 의학이 발달하였다.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고, 향가가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9세기 제51대 진성여왕 때 <삼대목>이 집대성되었다.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4. 찬란한 문화 유물

 

경주는 신라 천년의 문화 유산들로 가득 차 있어서 한마디로 자연박물관이다. 신라의  천년 수도였던 경주에는 역사와 문화, 불교와 과학, 기술과 예술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놓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보물이 가득한 곳 경주는 신라를 넘어 세계적인 고대문화 역사도시이다.

 

신라 건축 미술품 가운데 뛰어난 제작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최고 걸작은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 경내의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삼층석탑, 다보탑, 사리탑, 석조, 해탈교 등이 살아 숨 쉬는 예술품들이다.

 

신라 천 년의 숨결이 흐르는 석굴암의 본존불 조각상, 석굴암 석탑은 돌을 비단으로 바꿔 놓은 걸작품이다. 거대한 천마총 첨성대, 분황사, 성덕대왕 신종 등 진귀한 예술품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살아 있는 신화의 땅, 고대문화의 성지로 불린다.

 

석굴암은 김대성이 8세기 후반에 축조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냈다.

불국사는 김대성의 원찰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하였다. 석가탑, 다보탑은 신라탑의 대표적 석탑이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영지도 일품이다.

 

 

5. 최치원의 등장

 

최치원이 신라에 나타났다. 그는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소년의 몸으로 당나라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하고 당나라 관리가 되었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고 <토 . 황소 격문(討. 黃巢檄文)>이라는 명문장을 지었다. 황소가 그 글을 읽다가 상 앞에 엎어지는 것도 모르면서 문장에 푹 빠져 감동하였다.

 

최치원은 그런 모습을 본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 당나라에서 884년 음력 10월 귀국한그는 다음 해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돼있으나 이미 기울어진 신라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지방태수로 나갔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관직을 내놓고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와 함께 신라의 국운도 종말을 고했다.

<계원필경>과,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명문장 <난랑비 서문> 등을 남겼다.

 

 

 

[고대사 링크 목록]

 

1. 한반도에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 (상고시대)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6. 강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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