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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십제와 백제

2. 백제 융성의 세월

3. 의자왕의 반격

4. 황산벌 영웅 계백 장군

5. 낙화암의 전설

 

 

1. 십제와 백제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에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운 나라이다. 31대 의자왕까지 67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660년 8월 29일 멸망한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를 장식했다.

 

백제는 제26대 성왕16년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천도하며,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국호에 관하여는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와 고려 시대에 만든 <삼국사기>의 내용이 달라서,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전한다.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중부의 작은 부족들을 포함해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으며,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삼국사기> 기록에 실린 온조 설화는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유역의 토착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 초대 왕

인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주몽 동명성왕과 소서노 부부의 아들이며 , 백제의 최초 이름은 십제(十濟)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졸본 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오늘날의 인천)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 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전한다.

 

 

2. 백제 융성의 세월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제8대 고이왕때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소금의 산지였던 인천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16관등과 공복 제정과 함께 6 좌평과 상좌평까지 제정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4세기 제13대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면서 황해도 남부 일부 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던 마한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때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다시 겪었다. 제8대 고이왕 이후 낙랑과의 계속되는 대결에서 298년에는 제9대 책계왕이 전사하고, 304년에는 제10대 분서왕이 살해되었다.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제17대 아신왕이 항복하는 수난을 당하였다.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제25대 무령왕 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제26대 성왕 때에 이르러 중흥 노력은 더욱 커졌다. 그 뒤 제30대 무왕은 부훙을 위해 노력했으나, 31대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660년 나. 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탐라를 복종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때 중국의 오서 일대 및 산둥반도, 일본 규슈에도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송서, 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랴오뚱 일대를 점령한 시기에 백제가 요서(라오뚱 서쪽) 랴오시 지역을 정벌했다고 전한다. 5세기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려 결국 제21대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475년에 수도를 옮기면서 위기를 맞았다.

 

중국과 일본의 정세 변화로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제22대 문주왕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5세기 후반 제24대 동성왕 때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였다.

 

제25대 무령왕은 여러 지방에 왕족을 파견하여 통제권을 강화하면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제26대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모색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한편,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성왕은 고구려가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동맹을 맺고 한강유역을 빼앗아 수복하였다.

 

성왕은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을 신라 진흥왕이 어기고 독차지하자 이를 빼앗겠다며 복수전을 펴다 가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3. 의자왕의 반격

 

의자왕은 처음에 당나라와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어긋나자 당나라와의 외교를 포기하고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로 나섰다.

 

의자왕은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와 함께 돌궐. 고구려. 백제. 일본, 당. 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불씨가 된 것이다.

 

당나라는 신라 김춘추의 외교 담판으로 660년 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4. 황산벌 영웅 계백 장군

 

황산벌 전투는 660년 8월 20일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일어났던 전투이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과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조 등에 전투 내용이 나온다. 황산벌은 현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이다.

 

백제가 신라를 자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나. 당 동맹을 맺었다.

 

660년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명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 13만 명, 도합 18만 명의 군사가 백제로 쳐들어갔다.

 

당나라는 바다를 통해 백제의 백강쪽으로 쳐들어갔고 신라군은 육지로 달려가서 백제의 탄현 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660년 나 . 당 연합군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의자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편과 지연 작전을 써야 한다는 편으로 갈라져 다투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과 탄현을 넘어왔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5000 정예병을 뽑아 놓고, 비장한 각오로 가족들에게 말했다.

"한 나라의 군사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

 

스스로 가족들을 죽이고 황산벌로 달려가 전열을 다졌다.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치고 기다렸다.

 

계백은 병사들을 격려했다.

"옛날 월왕 구천은 5000 병사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용기를 다하여 싸워 나라에 보답하자!"

 

백제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신라군과 네 차례 마주쳐서 싸워 네 번 모두 크게 이겼다.이에 신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화랑도 출신의 아들 반굴을 전장에 투입하니, 반굴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반굴이 죽자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은 역시 화랑도인 16세의 아들 관창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다.

 

관창을 붙잡은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탄식을 하며 돌려보냈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야 오죽하랴!"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한 후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계백은 관창을 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관창의 죽음을 본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덤비니 백제군은 패하고 부하들과 함께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이때 백제군은 모두 전멸한 것이 아니라 일부 좌평  충상, 달솔 상영 등 20명이 살아남아 신라의 포로로 잡혔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신라군과 합류하였다. 당시소정방은 김유신에게 약속 기일이 늦은 것을 문제삼아 독군(督軍) 김문영을 참수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분노하여 말했다.

 

"황산벌 싸움을 보지도 않고 기일이 늦은 것만 책망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당할수 없다. 먼저 당나라 군대와 결전을 치른 후 백제를 공략하겠다"

 

김유신이 군문(軍門)에 나서자 소정방은 김문영을 풀어 주었다. 이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고 공격전을 폈다. 사비성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백제군의 저항은 계속되어 20여 성이 저항에 합류가 하였다. 태종 무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자 백제는 항복하고 말았다.

 

 

5. 낙화암의 전설

 

황산벌에서 계백의 군대가 전멸하고 당나라 군사 30만명이 백강 어귀를 타고 상륙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제의 운명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적군들이 함성이 귀를 찌른다. 의자왕은 눈을 감았다.

 

"아! 충신 성충의 말을 왜 듣지 않았던고? 700년 사직이 이렇게 무너져 내리다니!"

 

그때 좌평 각가가 급히 아뢰었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어서 곰나루로 피하심이 옳은가 합니다"

 

이미 밤은 깊어졌다. 의자왕은 부소산으로 급히 피신 명령을 내렸다. 도성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저희들도 따르겠나이다. 포로가 되어 능욕을 치르니 차라리 전하와 함께 생을 마치겠나이다."

궁녀들도 의자왕을 따라 나섰다. 그러나 의자왕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궁녀들은 부소산 낙화암으로 몰려갔다. 당나라 연합군은 성난 이리 떼처럼 마구 몰려오고 있었다. 잡히면 능욕을 치를 것이 뻔하였다.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음을택하자!"

어느 궁녀가 외쳤다. 궁녀들은 이 말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푸른 강물로 몸을 던졌다. 아까운 목숨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이때 강물로 뛰어든 궁녀가 무려 3000명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이 절벽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한다.

 

 

 

[고대사 링크 목록]

 

1. 한반도에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 (상고시대)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6. 강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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