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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자명고 이야기

2.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위력, 신라 진흥왕의 반격

3. 불교의 전래

 

 

 

1.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자명고 이야기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정벌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대무신왕에게는 호동 왕자가 있었다. 유리왕의 뒤를 이어 임금에 오른 대무신왕은 영역을 넓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대무신왕이 즉위한 뒤 15년이 되는 해 호동은 옥저 땅으로 유람을 갔다. 그때 최리는 호동왕자를 귀한 사람으로 보고 그를 데리고 낙랑궁에 들어가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최리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낙랑공주였다. 이후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호동왕자가 고구려로 돌아가게 되어 낙랑공주는 애틋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낙랑에 신기한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낙랑에는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어 대는 자명고가 있어요.”

공주가 슬쩍 들려준 것이다. 호동은 그 말을 가슴에 안고 고구려로 돌아왔다. 공주는  호동왕자와 헤어진 뒤 호동의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렸는데, 마침내 호동에게서 사람이 왔다. 공주는 사자가 전해 주는 편지를 보았다. 뜻밖에도 엄청난 밀서였다.

 

"낙랑의 무기고에 들어가 자명고를 찢어 주면 아내로 맞아 들이겠다.”

이는 실로 엄청난 부탁이다.

 

자명고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어 대는 귀한 보물 중의 하나였다. 공주는 호동왕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마침내 마음을 다져먹고 예리한 칼로 자명고를 찢고 사자에게 알려주었다.

 

호동은 이를 왕에게 고하고, 왕은 호동과 함께 낙랑을 쳐들어갔다.

낙랑은 자명고가 울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물밀듯이 쳐들어 오는데도 자명고는 울지 않았다. 낙랑은 어이없게도 고구려에게 당하게 되었다.

 

그 뒤 자명고를 공주가 찢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리는 크게 분노하였다. 최리는 한 칼에 공주를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을 하였다. 이에 호동은 쓸쓸히 고구려로 돌아왔다. 하지만 왕의 원비는 호동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걱정하며, 왕위를 넘본다고 부왕에게 고했다.

 

낙랑공주가 죽은 뒤 원비의 고자질까지 받은 호동은 점점 마음의 상처가 깊어졌다. 더구나 아버지 부왕이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된 호동왕자는 칼을 물고 젊은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낙랑공주와 이별 후 불과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슬픈 사랑이야 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2.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위력, 신라 진흥왕의 반격

 

제19대 광개토대왕은 적극적인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즉위한 뒤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여 약화시켰으며, 396년에는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다.

백제 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면서 고구려에 스스로 복종을 청하였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은 402년부터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하고 이어서 등장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시켰다. 북쪽으로는 부여, 숙신, 거란의 비려를 복종시켰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고 동예를 병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만주 통거우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414년(장수왕 2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1,800자의 비문은 고구려 역사와 한자 사용의 기록으로 매우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예서체는 서예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제20대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세웠다.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비하였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다. 이때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까지 지배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공격해서 죽령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넓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로 우뚝 섰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는 가장 강력한 나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23대 안원왕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 틈에 남쪽에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다.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 작전을 전개하고 한강 유역을  되찾은 것이다. 북쪽에서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같은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이 일어나고,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 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등장한 당나라와 신라가 연결하여 대립 상태에 놓였다.

 

 

3. 불교의 전래

 

제17대 소수림왕은 위기 극복을 위해 내부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중국의 전진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소수림왕 2년 부견이 순도 스님을 시켜 불경과 불상을 보내자 이를 받아들이고, 불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절을 지으니 한국 불교의 시초가 되었다.

 

불교는 호국 불교와 현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도교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 영류왕 7년에 당나라 고조가 양국 간의 친선 정책으로 도사를 보내 전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사신도 벽화는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고대사 링크 목록]

 

1. 한반도에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 (상고시대)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6. 강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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