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목차

 

1.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2. 유리 태자와 황조가

 

 

 

1.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구려 (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 부여 왕자로 전해지는 고주몽이 건국, 제28대 보장왕까지 705년 동안 위력을 떨치다가 668년에 멸망한 한국의 고대 국가였다.

 

고주몽은 졸본(오늘날의 요령성 환인 지역 )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한다. 기원 후 3년에 아들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장수왕 때에 국호를 잠시 고려(高麗)로 변경했으나,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전성기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토로 하여 세력을 떨쳤다.

 

전성기 때의 영토가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부 전역, 중국의 지린 성 전역, 랴오닝 성 대부분, 헤이룽장 성 일부, 내몽고 일부, 러시아의 연해주 일부까지 지배하는 거대한 나라였다.

 

부여 및 한사군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산간 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사정으로 인한 부족한 농토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의 비옥한 영토를 지닌 부족 국가들을 정복하는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영토 확장을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고구려는 국가적 체계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주변 유목 부족과 연맹체들을 침략하여 북옥저와 졸본, 국내성 주변의 지역을  정벌하였다.

 

부여는 기원전 6년과 13년 고구려를 침공하고 부속 국가가 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21년에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부여의 대소왕을 죽였다.

 

28년 한나라가 위협을 느껴 군사를 일으켰으나 국내성에서 한나라를 막아냈고, 32년 낙랑을 정복하는 등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 위세를 떨쳤다.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제6대 왕 태조 때부터다.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옥저. 동예, 남으로는 살수, 북으로는 부여를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한나라의 요동군. 현도군과 대립하였다.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 국가로서의 위력을 자랑하였다. 가난한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제9대 고국천왕은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194년에 실시하여 빈농 구제 정책을 펼쳤다.  왕위의 형제 상속을 부자 상속으로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고구려 고주몽의 건국신화>

 

북부여의 금와왕은 어느 날 우발수라는 강가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냇물을  다스리는 화백 신의 딸 유화로. 부모의 허락 없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하여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이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이 유화를 궁에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그 방으로 이상한 햇살이 들어와 비친 뒤에 임신하여 큰 알을 낳았다. 알에서 잘 생긴 사내 아기가 나왔다. 그 아이의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는 재주가 비상하고 승마와 활쏘기를 잘해 금와왕의 다른 아들이 질투하여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도망쳐서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37년이다. 그래서 그의 성씨도 고씨가 되어 고주몽이라 하였다. 

 

고구려 건국 신화는 주몽이라는 군장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의 지배층이 이주해 와서 계루부를 형성하였고, 기존의 토착 세력인 소노부를 대체하여 고구려 연맹 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 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 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2. 유리 태자와 황조가

 

고주몽 동명성왕에게는 유리 왕자가 있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에 북부여에 있을 때 정실부인인 예씨가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유리 왕자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를 세웠으므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면서 자랐다.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 보물을 묻어 두었으니 그걸 찾아오면 내 아들로 인정하겠다!"

 

유리는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를 찾느라고 이산 저산을 헤매었으나 아버지가 숨겨 두었다는 보물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남쪽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춧돌을 바라보았다. 일곱 모가 난 돌이고 기둥이 소나무였다.

 

"아! 여기로구나!"

 

유리는 주춧돌 밑을 파 보았다. 부러진 칼이 나왔다. "드디어 찾아냈다!" 

 

유리는 그 칼을 품에 안고 남쪽 졸본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극적으로 만나고 고구려의 왕자가 된 뒤, 제2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기원전 17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노래가 <황조가>이다. <삼국사기>에  4언 4구의 한시 형태로 번역되어 전하고 있다.

 

이 노래는 창작 연대가 기원전 17년 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문학사적으로 최초의 서정요(抒情謠)라 는 데 그 존재 가치가 매우 크다.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황조가-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가 서로 노니는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의 이야기는 다분히 연정적이고도 회화적이다. 

 

유리왕 3년(기원전 17년) 7월, 골천에 별궁을 지었다. 

그해 10월에 왕후 송씨가 죽자 대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처로 맞았다. 하나는 화희인데 골천(지명이름)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인데 한나라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대왕은 양곡에 동.서로 두 개의 공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대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나라의 천한 첩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화를 내며 친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 황조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를 지었다.

 

 

 

[고대사 링크 목록]

 

1. 한반도에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 (상고시대)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6. 강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반응형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