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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얄타 회담
2. 모스크바 3상 회의
3. 일본의 항복
4. 광복의 환희
5. 분단의 날벼락
6. 신탁통치의 결정 과정
1. 얄타 회담
얄타 회담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을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가운데 하나인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이끈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도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을 패배 시키고 그 후를 의논하기 위하여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다.
이 회담에 참여한 지도자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 당 서기장,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였다.
이 회담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 독일을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등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고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나치 독일의 군수 산업을 폐쇄하고 몰수하며, 전쟁의 주요 전범들은 독일 뉘른베근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하고, 전쟁 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처리한다는 것 등이다.
2. 모스크바 3상 회의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등으로 불린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뒤의 일본 점령 지구에 대한 관리 문제를 비롯하여 얄타 회담 합의를 바탕으로 일본이 패망한 뒤의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연합군은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카이로 회담을 갖고 여기서 일본 패망 후 한국에 대해 적당한 시기까지 신탁 통치를 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외무장관들이 서명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 라이벌인 미국과 소련군 사령부는 한국에서 단일 자유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4개국 열강에 의한 5년 간의 신탁 통치가 한국의 독립 이전에 필요하다.”
이 위원회는 처음부터 양측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미국은 임시정부 수립 없이 5년에서 최대 10년 동안 4개국이 신탁 통치 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과 공동 위원회 개최,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한국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문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 수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한국 신탁 통치 안>
1.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 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서>
1.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 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 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 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의 한 방책을 고출하기 위하여 남조선 합중국 관구, 북조선 소련 관구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희가 설치될 것이다. 그들의 제안 작성에 있어 그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이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가진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 영, 소, 중 제국정부에 그 짐작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또는 조선 국가 독립의 수립을 원조 협력(신탁통치)할 방책을 작성할 것도 또한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수행할 과업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개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제국 정부의 공동 짐작에 이바지하도록 임시 조선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군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3.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이 방송은 하루 전날 녹음한 것을 들려준 것이다.
[대동아 전쟁의 종결 조서]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재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을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 짐의 백관들의 여정, 짐의 일억 중서의 관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 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에서 죽고 직역에 순직했으며 비명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전상을 입고 채화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청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이 적성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 일가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4. 광복의 환희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여 일제 강점기에 놓였던 한국이 독립을 성취하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는 빛을 되찾았음을 의미하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1948년의 같은 날짜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건국을 함께 기념하는 날로 여기기도 한다.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과 그를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에 의해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이날 경성(서울) 시민들은 이 방송을 듣고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은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인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에서 류사쿠이 정무총감과 만나 교섭을 벌여 5개 조항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키고 치안권과 행정권을 되찾았다.
<5개 조항>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많은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집 바로 옆에 있는 휘문 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한 감격의 연설을 하였다.
"조선 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 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광복의 기쁨을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 주기를 바란다.” 고 말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 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 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제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 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지금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 대학교 중학교에 학생 경비 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5. 분단의 날벼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 소 군정 기간을 거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남과 북에 다른 정부를 수립하면서 분단국가로 전락하였다. 남북 분단이라고 도 한다.
대한제국 때에 동북아시아에는 전통 강대국인 중국 청나라가 쇠퇴하고,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패권 다툼을 하였다. 이때 러시아 외무부는 조선을 러. 일 간의 완충국으로두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청.일 전쟁으로 청나라에게서 조선을 빼앗고, 러.일 전쟁에서도 예상 밖으로 승리하여,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최강대국은러시아였지만, 러. 일 전쟁 중에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나내란상태에 빠지자,일본과의 전쟁에서 철수해 버렸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망을 알아챘고 이를 견제하고자 러시아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사례가 바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간 아관파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견제가 심해지자 이들의 힘이 미치지 않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취를 옮긴 것이다. 하지만 러.일 전쟁으로 급격하게 힘의 균형이 깨지고 대한제국은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미. 일 전쟁인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의 예전 주장대로 38선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완충국으로 설정하는데 동의하였다.
1) 청. 일 전쟁 : 1894년 6월-1895년 4월 사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이다.
2) 러. 일 전쟁 : 1904년-1905년에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다.
3) 태평양 전쟁 : 1941년-1945년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4) 38선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미. 소 양국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 분계선이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두 발의 원자탄을 얻어맞고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그날도 소련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일본과 전투 중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기로 제안하여 합의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일본이 패망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서울에 주둔하여 1945년 9월 6일부터 군정을 실시하였다.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광복을 맞이했으나, 곧이어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해 주둔함으로써 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에 남북한에서 좌우익 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평양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인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6. 신탁통치의 결정 과정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와 한민족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반도 내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치안과 행정권을 담당하여 혼란한 해방 정국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얄타 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미. 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포고령이 선포되고 미국과 소련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되면서 군정 시대를 맞은 것이다.
군정 기간 동안 좌. 우익 세력의 대립과 갈등으로 통일의 구심점을 잃고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이후 분단이 굳어지면서 남북이 단독정부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해 9월, 한반도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포고령을 선포함으로써 군정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안 문제를 놓고 한반도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곧이어 1946년 5월에는 미. 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양측의 주장이 엇갈려 결렬되었다.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등 해방 정국의 잇단 정치 테러가 발생하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총회로 이관하여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결정되자, 김규식, 조소앙 등에 김구가 합세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등 노력하였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등으로 사실상의 공산 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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