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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격렬한  무력 투쟁

2. 청산리 전투

 

 

 

(근현대사) 1. 일제 강점기 1910년대 (1910년~1919년)

목차 1. 잃어버린 세월 2. 독립운동 전개 3. 해외에서의 항일운동 1. 잃어버린 세월 일제 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까지를 말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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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격렬한  무력 투쟁


간도와 만주, 연해주 등지를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 무장 단체들은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평안북도 갑산, 함경남도 해산,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대에서 일본 군대에 대항하면서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만주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만주 청산리 전투가 유명하다.

 

일제는 국경 지방의 독립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6월 [홍범도부대]는 북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쳐들어 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그 뒤 김좌진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던 독립군 연합 부대도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5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각 부대들은 대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독립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그런 가운데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오는 흩어지고 말았다.

 

시련을 겪은 무장 독립 운동 세력들은 다시 결집하고자 민정 및 군정 기관 형태인 3부를 조직하였다. 3부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이다. 이를 통해 조직을 재정비하고자 하였지만, 1925년 일본 제국과 만주 군벌 장쭤린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어 만주에서도 무장 독립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20년대 말에는 남만주 지역에 참의부, 정의부가 통합하여 국민부가 결성되어 조선 혁명군으로 결성되었고, 북만주의 신민부는 혁신 의회로 통합되어 한국 독립군으로 계승되었다. 

이들은 한.중 연합 작전을 통해 대전자령 전투, 영릉가 전투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2.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는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간도에서 일본 육군과 벌였던 전투를 말한다.

 

김좌진, 나중소, 서열,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을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가 만주 지린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싸웠다.

 

1920년 10월 21일 길림성 화룡현에서 싸움이 시작된 이래 1주일 동안 여러 지역에서 교전하고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실패로 만들었다.

 

청산리는 조선의 교민들이 많이 모여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사방을 에워싸듯 둘러싼 주의의 산은 산세가 험하고 복잡하였다. 산악 뒤편으로는 울창한 숲지대이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대한군 북로독 군부의 홍범도는 그 해 7월 11일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총독부는 만주 심양의 독자적인 만주 군벌 장쭤린에게 여러 차례 중. 일 합동 수색대를 편성해 독립군을 색출하자고 제의했다. 일본 측의 제의에 장쭤린은 머뭇거렸고, 한인 독립군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보고 연락하였다.

 

장쭤린은 마지못해 우에다와 사카모토가 주도하는 중.일 합동 수색대를 편성했다. 그러자 길림성 장서정림은 이를 반대하면서 강하게 항변하였다.

 

"조선인 독립군이 중국인이나 기타 민간인, 자국 교포들을 함부로 약탈. 방화하거나 강탈해 가지 않는 점을 이유로 들어 중국 측이 조선인 독립군 토벌이나 추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1920년 7월 11일 노두구에서 일본 영사관 병력이 홍범도의 소규모 중대에게 전멸당하자, 일본은 중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쯤 400여 명의 마적 (말을 타고 떼지어 다니는 청나라 말기 도둑으로 만주 지방에서 활동함) 떼가 훈춘을 습격해 40여 명을 살해하고 일본 영사관 분관과 그 소속 관사를 방화하고 일본인 1인과 수십 명의 조선인. 중국인을  납치해 퇴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조선인 독립군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일본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대군을 즉각 투입했는데 조선군 제19사단 9000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포조군 14사단 4000여 명, 11사단 19사단, 20사단, 그리고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000여 명 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이었다.

 

조선인 독립군은 만주 삼둔자 전투와 중국 지린성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라 사기가 올라 있었다.

 

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 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다. 북로군정서도 다른 독립군 부대처럼 중국군과의 약속 때문에 깊은 밤중을 틈타 주로 산길로 이동해 한 달 만에 450리 길을 걸어 10월 12-13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다

 

청산리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이 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합류했다

 

일제는 중국에 압력을 넣어 일방적으로 2개월 동안 주둔하겠다고 통고하고는 1만 5000여명 규모의 일본 군대를 두만강 너머에 배치했다.

 

주력 부대인 동지대는 5000명으로 편성하여 삼도구로 나가게 하고,다른 세 지대는 각각 담당 구역을 정해 내보냈다.

 

일본군은 얕보던 조선 독립군에게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관동 지방에 주둔 중인 부대 및 시베리아에 나가 있던 부대까지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포위하고 공격해 갔다.

 

그러나 다수의 독립군들은 도주했을 것으로 계산하여, 동시대 37연대 외에 조선 주둔 일본군 보병사단 19사단과 20사단의 일부를 따로 편성한, 소규모 대대급 부대들을 더 늘렸다

 

일본군 병력은 2만 9000명 에서 4만 명 정도 안팎이었다. 일본군은 보병, 기명, 야포병, 공명 등의 혼성 부대인 일본군 만주 동지대 소속 1만 명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1920년 10월 10일 경 안무의 연합부대는 이도구 부근의 간도 유동으로 이동하고, 그 병력은 홍범도 부대와 합하면 약 1950명이었다.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마을의 노인들에게 허위 정보를 퍼뜨리게 하였다.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

 

그때 일본은 1920년 10월 초, 만주의 한인 독립군 소탕을 위해 간도로 출병 명령을 내렸다

 

첩보원으로부터 왜병이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은 이범석은 산꼭대기에 올라 망원경으로 일본군 동지대의 이동을 지켜봤다.

 

정탐군을 보내 보병, 포병, 기명, 공병을 합친 병력이 1만 명으로 일본 파병군의 선발대임을 알았다. 이범석은 근처 한인 교포와 사냥꾼을 모은 뒤 마을의 부녀자와 노인들에게는 일본군을 만나면 “독립군은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총을 가진 병사 수도 몇 안되며 굶주려 지쳤다.”라고 소문을 퍼뜨리도록 사전에 지시해 놓았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 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김좌진, 이범석 등은 탄환을 직접 분배하고 철저하게 작전 준비를 마쳤다.

 

10월 20일 오전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본 군대와 교전이 시작되고 그날 날이 저물도록 전투가 계속되었다. 격전을 전개하면서 기회를 노리던 독립군은 일본군 선발대의 선봉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다음날인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의 또 다른 선발 보병 1개 중대는 독립군의 매복 사실을 모른 채 하루 전에 독립군이 행군한 길을 따라 백운평에 들어왔다.

 

90여 명의 일본군 야스카와 부대의 전위대 전투 병력이 백운평 안에 들어서고, 선두가 북로군정서군 제2 대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 걸음 앞에 도달했을 때인 오전 9시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감행하며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독립군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며 응사하던 일본군 전위 부대 200명은 교전을 시작한 지 20여 분만에 전멸되고 말았다.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야마다 토벌대대 본대는 전위 부대의 전멸에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자는 늘어났다. 

 

절벽 위에서 조준 사격 하는 독립군에 의해 막대한 희생을 치른 일본군은 거의 전멸하고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도망쳤다.

 

이후 중무장한 야마다 부대의 주력 부대가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 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찾지 못하고 전사자들을 남긴 채 도망치고 말았다.

 

북로군정서군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의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대신 갑산촌 부근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 중대 120여 명을 섬멸시켰다. 백운평과 천수평에서 거듭 승리한 독립군은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리적 형태를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 작전, 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낸 통쾌한 승리였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제는 약 두 달 동안 독립군의 근거지라고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의 학교가 불에 탔다. 이를 도학살사건 또는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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