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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의 실패

2. 조선어학회 사건

 

 

 

(근현대사) 1. 일제 강점기 1910년대 (1910년~1919년)

목차 1. 잃어버린 세월 2. 독립운동 전개 3. 해외에서의 항일운동 1. 잃어버린 세월 일제 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까지를 말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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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의 실패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치안 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근거로 일제 당국은 조선어 말살을 더욱 강하게  억압하였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한국어를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조선어를 일상생활이나 신문 등에서 완전히 빼낼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21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능력 시험에 합격한 직원을 승진과 급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철저하게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1943년 당시까지도 일본어를 해석하는 조선인은 1,000명 당 221.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강요해도 80%의 조선 사람들이 일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성씨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억압해도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고 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2.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이야기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써 일제는 3.1 운동 후 부활한 한글 운동을 폐지하고, 조선 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글 운동이 3.1 독립운동 뒤에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 .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 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 갔다. 1936년에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회원을 검거하였다.

 

조선 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 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처럼 일제 탄압이 숨 막히게 조여들자 조선어학회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하였다.

 

그해 10월 1일, 첫 번째로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등 11명을 서울에서 구속하고,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들을 검거하면서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에 이윤재가,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 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언징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언도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8월17일 풀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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