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
2.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개편 (김구)
3. 중요한 독립운동들(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의열단활동)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었다.
3.1 독립운동 이후 각 지역의 임시정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역할과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이때 서울에서는 한성정부, 시베리아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의 ,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따로따로 활동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여러 개로 쪼개져서 활동하는 것은 파벌만 조장하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나뉘어 있던 것을 하나로 엮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이는 한반도의 13개 도 국민대표회의가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그때 상하이는 국제적 항구 도시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의 특별 후원 아래 경찰 및 행정을 관리하던 조계 (租界) 지역이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 정원 의장에 이동녕,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무총장에 이시영,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등을 선출하였다. 이어 임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제를 내세워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하고 각료들을 개편하였다.
이승만은 국제적 외교로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파리 강화희의와 1921년 워싱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했으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교 활동에 소득이 없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하면서 민족대표기관의 명맥을 잃게 되었다.
2.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개편 (김구)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전환하여 김구를 국무령으로 뽑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까지 대체로 침체되었으나, 김구가 맡으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김구는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 총독의 암살을 지시하여 조선으로 보냈다. 한편으로는 상하이 사변 승진 기념일인 천양절을 맞아, 홍구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장에 윤봉길을 보내 폭탄을 던지게 하여 일본 요인들을 살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사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 다녀야 했고, 임시정부도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지원하게 되었다.
김구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간 상하이에서 피신하여 난징으로 옮긴 뒤 1933년 장제스와 항일전선 협력에 합의하였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10월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를 맡았다.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함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난징과 창사를 거쳐 1940년에는 충칭으로 옮기게 되었다.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1920년대의 민족해방 운동은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군의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독립운동 방법론에 차이가 생기면서 분열이 일어나고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임시정부 주도의 독립운동은 한동안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 애국단이 활약하면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애국단의 일원이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내 후에 중. 일 전쟁 이후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발판이 된 것이다.
3. 중요한 독립운동들
간도와 만주 연해주의 조선 동포들을 기반으로 조직된 항일무장 단체들은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방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 계열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1926년 6월 10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국장일을 기해 일제에 항거하는 6.10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일제 강점기 때 가장 큰 민족 단체는 신간회였다.
신간회는 자치 운동을 주장하는 세력과 결별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 계열이 모여 만든 단체였다. 국내의 많은 대중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3.1 독립운동 이후 가장 큰 항일운동으로 전남 나주역에서 한국 여중생을 일본 남중생들이 희롱하는데 분개한 한국 학생들이 1929년 11월 3일 항일운동의 성격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일으켰다.
의열단 투쟁도 일본요인의 암살, 파괴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역사 수행평가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현대사) 5. 일제의 무단 통치(1910년대)와 창씨 개명(1940년대) (0) | 2023.12.16 |
---|---|
(근현대사) 4. 일제 시대 일본의 조선침략사, 민족 혼 말살 정책 정리 (0) | 2023.12.16 |
(근현대사) 2. 1919년 3.1 독립 운동의 의의와 보성 인쇄소 사건 (0) | 2023.12.16 |
(근현대사) 1. 일제 강점기 1910년대 (1910년~1919년) (0) | 2023.12.16 |
5. 제 6 공화국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현대사) (0) | 2023.12.15 |
- Total
- Today
- Yesterday
- 수학문제집
- 중간고사대비
- 임대차계약
- 영어독해
- 고난도문제
- 수학문제풀이
- 티스토리챌린지
- 법률 상담
- 상가임대차
- 임대차분쟁
- 교통사고
- 노인돌봄
- 사망보험금
- 내신 대비
- 법률상담
- 공통수학1
- 국가자격증
- 고령화사회
- 자기주도학습
- 내신대비
- 100발100중
- 영어공부법
- 오블완
- 사이버대학교
- 내신콘서트답지
- 기출문제
- 건강관리
- 서술형대비
- 내신수학
- 수능대비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