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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3.1 독립운동의 폭발

2. 보성인쇄소 사건 - 눈감아준 경찰

 

 

 

(근현대사) 1. 일제 강점기 1910년대 (1910년~1919년)

목차 1. 잃어버린 세월 2. 독립운동 전개 3. 해외에서의 항일운동 1. 잃어버린 세월 일제 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까지를 말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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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 독립운동의 폭발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학생과 청년들은 수십 만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온 거리를 휩쓸었다.

 

이로써 3.1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핍박받던 한국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전개된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의 조류에 편승하여 1919년 대규모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한 독립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1 독립운동은 3.1 운동, 3.1 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 3.1 인민봉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3. 1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친일파 육성에 나섰다. 문화 통치를 시행한 것이다.

 

문화 통치는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웠던 강경책을 문화 통치라는 이름으로 정책을 바꾼 것 일 뿐, 가혹한 식민통치를 눈가림하려는 속임수였다.

 

헌병 경찰제를 일반 경찰제로 바꾸고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일에 고등 경찰제를 앞세워 더욱 악랄해졌다. 때마침 고종황제가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러자 일본은 이런 소문을 차단하고자 마구 탄압하여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이는 만세 시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를 48인이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는 3.1독립운동 당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에 알린 스코필드도 포함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만세운동이 실패한 뒤에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다. 이 운동은 전국에서 3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가 106만 여 명이고,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000여 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일제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 퍼져 나갔고, 간도. 시베리아. 연해주. 미주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적어도 200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하여 투쟁하는 동안에 232개의 부. 군 가운데 229개의 부. 군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1,491건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때 160개가 넘는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했다. 그러나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집단 학살. 고문. 심문. 방화 등 무력 탄압으로 3.1 독립운동은 탄력을 잃어갔다.

 

이 운동으로 정부 수립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항일 무장투쟁이 더욱 촉진되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이 등장하였다. 이로 인해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학생들이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농민, 노동자, 여성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 보성인쇄소 사건 - 눈감아준 경찰

 

1919년 3월 3.1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중심으로 기독교인, 불교인, 유교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대표인 손병희 등 33인이 주도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의 일화가 전한다.

1919년 2월 하순 보성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을 때였다. 오세창에 의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 인쇄소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은 이종일 사장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게 하고 <독립선언서>를 보았다.

 

"엄청난 일이군!"

그는 신음 하듯 한마디 하고는 그냥 돌아갔다. 보성 인쇄소 사장 이종일은 급히 최린 (나중에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에게 보고하였다. 최린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고 고등계 형사 신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신설은 오히려 대담한 표정이었다.

 

"나도 조선 사람이오!"

만일 그가 이 사실을 경찰서에 보고하였다면 3.1 운동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지도자들은 모두 체포가 되는 사태가 빚어졌을 것이라고 역사는 전한다.

 

이 때문에 2월 28일 손병희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를 태화관으로 바꾸었으며, 당초 3월 3일로 예정된 3.1 운동 거사도 3월 1일로 앞당겼다. 최린은 신철에게 여비를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전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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