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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제의 무단통치(1910년대)
2. 창씨개명의 비극(1940년대)
1. 일제의 무단통치(1910년대)
일본은 조선총독부 초대 조선 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내보내 1910년 9월에 헌병을 창설하고 2만여 명의 헌병 경찰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하고 무단 통치에 돌입하였다. 이를 통감기라고도 한다.
무단 통치는 총칼을 앞세운 무력 정치를 말한다. 헌병이 일반 경찰의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는 것이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 혹은 일본 예비역 장성 가운데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천황의 직속이라 내각이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총독의 아래에는 행정과 교육, 문화를 담당하는 정무총감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총감을 두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가운데 헌병 보조원을 채용하여 헌병들의 업무를 보조하게 하여 헌병 중심의 억압 통치를 실시하였다.
헌병 경찰은 치안 업무와 함께,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걸쳐 관여하였는데, 여기에 당시 통치의 억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가 조선인 태형 명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태형을 부활시켜 조선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인의 각종 단체가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제는 신문법, 출판법, 보안법을 통해 조선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제한하였다.
일본은 제1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좁혀 놓았다. 학제는 보통 교육과 전문학교, 실업학교만 인정하고 대학 교육을 허용하지 않았다.
애국계몽 세력이 설립한 사립학교를 서당 규칙과 사립학교 규칙을 통해 통제하였다. 이 시기에는 교사가 군인처럼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칼을 차고 무장한 채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2. 창씨개명의 비극(1940년대)
한국 사람들을 일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면서 일본과 조선 사람들은 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황국 신민화 정책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황국 신민의 역사의 암기, 그리고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에서의 한글 교육을 중단시켰다.
이와 함께 조선의 역사도 배울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사람의 성씨와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시키고 강제로 학교 이름을 바꾸게 만들었다.
"조선이 일본 영토인 이상 조선어는 일본어의 방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방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조선어는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
조선어를 방언이라고 몰아치며 강제로 폐기시키고 일본어가 모국어이자 표준말이라고 밀어붙였다. 학자들을 앞세워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1938년에는 제3차 교육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국어는 일본어라고 강제로 규정하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학교에서는 조선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고 조선에서도 일본식 성씨와 이름에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각자 성씨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창씨 개명은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본 정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었다.
창씨개명령은 조선인의 집단 반발은 물론이고 일본과 조선총독부에서도 반대와 비난, 반발에 부딪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만 해도 창씨 개명에 반대하였다.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 계획을 밀어붙여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1942년 미나미가 조선 총독에서 해임되었다.
창씨 개명 시행은 조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반발은 거세졌고, 친일 인사들조차 혼란에 빠졌다.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많았다.
일본인들도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조선총독부 경찰은 조선인이 똑같이 일본식 이름을 쓰게 되면, 누가 조선인이고 누가 일본 사람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조선의 정치 지도자 중 윤치호는 창씨 개명에 부정적이 있다는 이유로 1940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창씨개명은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 가구 수가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협박. 강요하여 신고마감 시기까지 322만 가구, 79.3%이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씨개명은 광복 후인 1946년 미군정과 소련 군정에 의해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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