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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무령왕릉과 사비성고분

2. 백제의 부흥 운동

3. 백제의 대외의 무역

4. 건축과 미술

 

 

1. 무령왕릉과 사비성고분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이기도 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 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금세관,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지,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백제 미술의 우수성이 나타나 있다.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국가상, 사회 생활, 외국과의 문화 교류,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예법은 물론, 특히 삼국 간의 문화 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사비성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 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화강암 벽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소박한 옷차림, 엷은 미소를 띤 온화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하다.

 

 

2. 백제의 부흥 운동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 제30대 무왕은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제31대 의자왕 2년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 개를 점령하고 경주 가까이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이던 연개소문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삼국 통일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오늘날 전북 부안 추정)과 임존성 (오늘날 충남 예산)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 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이 백제에 원군을 보내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 일본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하지만 백제. 일본 연합군이 대패하여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3. 백제의 대외의 무역

 

백제의 관서는 크게 대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나뉘어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곡부.육부.내경부.외경부.마부.도부.공덕부.약부.목부.법부.후궁부 등인데, 이들은 왕실. 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관부.점구부.외사부.조부.일관부.시부 등이다. 이들은 일반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거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 되었는데,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였다. 그래서 수도를 5부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백제는 중국 남부 및 일본과 무역이 성행하였다.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는 말.누에.직조법.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을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 당항성 등이 크게 번성하였다.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고, 무령왕 때 단양이. 고안무 등이 일본에 유학을 전하였다.

 

초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하여 우호적이었지만, 고국원왕 39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한 이래로 사이가 나빠졌다. 이 상황은 나. 제 동맹의 결렬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 일화로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낮춰 부르기도 하였다. 잔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뜻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보면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진나라 사서인 <진서>에이름이 기록된 왕이다. 백제는 372년 근초고왕 27년 음력 1월과 음력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고 하는 백제의 기본 외교 자세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즉위년인 384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을 하였다.

 

470년 송나라 때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개로왕은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의 무령왕과 성왕은 여러 차례 사신들을 보냈고 귀족 칭호들을 받았다.

 

백제가 동아시아 대륙의 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역사 서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는 기원전 3세기,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사람들이 건너간 것으로 나타나 있다. 대략 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에 벼농사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런 사실은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 보면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데 기여하였다.

 

 

4. 건축과 미술

 

백제는 삼국 가운데 특히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초빙되었고, 일본의 초기 사원을 창립할 때에도 백제의 사공과 기와 만드는 기술자 등이 건너갔다.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 망해정 등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 일대와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다. 웅진 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이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고분에서 그 규모가 잘 반영되어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가 있고, 이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 태자,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 등이 있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낙랑. 대방의 한나라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는 <서기>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아직기. 왕인 등이 일본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경박사가 교대로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 (옷 기술자). 야공(대장장이). 양주인(술 제도 기술자)을 비롯해 와박사(기와 전문 기술자). 조사공(명주실을 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 등의 건축 기술자도 파견되었다.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지배층 사람들은 투호놀이와 바둑, 장기를 오락으로 즐겼다.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 고 기록하였다.

 

이는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불교는 제15대 침류왕 때인 384년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와 전해 준 것이 처음인데, 그해 음력 9월에 동진에서 승려 마라난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대접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침류왕은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 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 제27대 위덕왕 때에 착공해 634년 제30대 무왕 35년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 제29대 법왕 1년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다.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 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사 링크 목록]

 

1. 한반도에서 고조선 이전의 역사 (상고시대)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6. 강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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