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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2. 당 태종과 양만춘
3. 연개소문과 아들들
1.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복종을 요구하자, 고구려가 완강히 거부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향해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다.
수나라 초대 황제 문제는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1차 침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612년 수 양제는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되찾겠다면서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양제는 내호아를 수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요동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이들을 살수로 유인하여 살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수나라는 이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여 멸망하였다. 고구려 역시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612년 음력 1월,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때에 을지문덕이 수나라 양제의 113만 3,800명의 병력을 거의 몰살시킨 전쟁이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요동성과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피해만 커지자 음력 6월에 수군과 육군의 별동대로 개편하고 평양성을 단숨에 공격하려고 하였다. 육군은 우문술, 우중문, 설세웅, 장근 등이, 수군은 내호아, 주법상이 지휘하였다.
육군보다 빠르게 평양 패수(오늘날의 대동강)에 도착한 내호아는 부총관 주법상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대파를 당했다. 이로써 평양성으로 향하는 별동대는 30만 5,000명의 육군만이 남았다.
별동대는 원래 100일치 식량과 방패, 갑옷, 옷감, 무기 등 온갖 물자를 갖추어 행군을 시작하였으나 병사들이 3 가마니 이상되는 무거운 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쌀과 조를 버리고 가는 자는 목을 베겠다!”
엄한 군령이 떨어졌음에도 모두 군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래서 행군 도중부터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며 수나라 군의 군영에 들어가서 그 허실을 살펴보고 나왔다.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 잡으라는 양제의 밀지를 받았던 우문술과 우중문은 그를 억류하고자 하였는데, 위무사로 종군하고 있던 상서우승 유사룡이 제 발로 찾아온 장수를 잡아 가두는 것은 나라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라며 말려서 그만두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여 을지문덕을 다시 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오늘날의 압록강)를 건너가 버렸다.
우문술은 제발로 걸어 들어온 을지문덕을 놓쳤고 식량도 다 떨어져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우중문은 화를 벌컥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우문술 역시 언성을 높였으나, 일전에 양제가 우중문에게는 계획성이 있으니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자문을 구하라고 하였기에 부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초반에는 하루에 7번 싸워 모두 이겼다.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계속 진격하니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을지문덕의 기만에 의한 유도 작전이었다. 수나라 군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이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지는 척하면서 후퇴했던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는 희롱하는 시를 보내고, 우문술에게는 거짓 항복하며 만약 군대를 돌리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뵙겠다고 하였다.
수나라군은 지칠 대로 지쳐서 다시 싸우기가 힘들었던데 반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단숨에 함락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거짓 항복을 명분으로 삼아 회군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을지문덕은 끈질기게 추격하여 싸우다가 후퇴하는 전술을 반복하였다.
음력 7월, 수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뒤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에 이르러 반 쯤 건너자, 고구려 군대가 수군을 집중 공격했고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이에 수많은 적군들이 서로 먼저 도망치려고 하는 바람에 여러 군사들이 함께 넘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면서 떼죽음을 당했다.
이때 평양 밖 포구에 주둔하고 있던 내호아도 살수대첩의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30만 5,000명이었으나 그중에 요동반도로 다시 돌아온 자는 겨우 2,700명이었다. 수많은 군수 물자와 병기는 모두 잃어버렸다. 수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음력 7월 25일에 본대 병력을 이끌고 철수하니 제2차 고구려. 수나라 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우문술 등 살아남은 장수들은 모두 작위가 박탈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다만 설세웅은 분전한 점이 인정되어 면직으로 그쳤고, 위문승은 홀로 전력을 보전한 채 퇴각한 공이 있어 금자광록대부로 승진했다.
을지문덕을 잡을 기회를 놓치게 했던 유사룡은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다. 수 양제는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듬해 우중문을 제외한 모든 장수를 복권시키며 제3차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일으켰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교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거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2. 당 태종과 양만춘
고구려는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와도 대결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 태종은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편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에게 대패하였다.
645년, 당 태종 이재민이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을 되찾기 위해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왔으나, 고구려가 이를 격퇴시킨 것이다.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계속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때마다 격퇴하였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주변국들이 대부분 당나라에 복종되면서 고구려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놓였다.
고구려는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661년 당나라와 대규모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이를 잘 막아냈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전쟁을 치르며 국력이 쇠퇴해 갔다.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60여 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거기다가 지배층의 내분이 더욱 커지면서 국력을 약화시켰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때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있었다. 고구려.당 전쟁 때 크게 활약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하여 제27대 영류왕과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 안시성 성주는 연개소문의 반정에 반대하며 복종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그러나 안시성에서는 군관민 일체로 협동하여 당나라 군대와의 3개월에 걸쳐 하루 평균 5-6 차례씩 양만춘 장군의 영전 고구려의 명장으로 보장왕 때 얀서성의 성주가 공격전이 벌어졌다.
당나라 군사들은 안시성을 포위한 채 공격을 시도했고 성 안에서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싸웠다. 당 태종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기록에는 태종이 끝까지 안시성 방어를 성공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였고 이에 안시성 성주가 감사히 여기며 하례하였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실제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긴급히 퇴각하던 당나라의 당시 사정을 볼 때 당나라의 기록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안시성 전투는 1차 고구려.당 전쟁 중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에 하나였지만 안시성의 성주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후세에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으로 밝혔다.
645년, 1차 고구려.당 전쟁 때 성공적으로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지만, 668년 3차 고구려. 당 전쟁 때 당나라 부대가 안시성을 또 공격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 앞에서 아직 군사 대열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 3만명이 습격하여 당나라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다. 그 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요동 지역에는 당나라에 저항한 11성 가운데 안시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671년 안시성은 끝내 함락되었다.
3. 연개소문과 아들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연개소문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반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산 형제는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다투었다.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나라 고종에게 항복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나. 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고대사 링크 목록]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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