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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조영의 등장
2. 고구려의 정신으로
3. 발해의 흥망성쇠
4. 해동성국
5. 외교와 학문
1. 대조영의 등장
고구려 장군인 [대조영]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발해를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와 동부, 연해주에 걸친 드넓은 지역을 영토로 다스렸다.
696년 거란족의 반란이 영주에서 일어나 당나라와 싸웠다. 고구려 장수인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이 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천문령 전투에서 맞서 싸운 뒤 승리를 거두고 [698년] [동도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대조영은 기세 좋게 고구려의 기상을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구려의 후손이다. 고구려가 나. 당 연합군에게 망한 뒤 이 넓은 땅은 우리 눈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에 나는 고구려의 희망에 넘치던 대제국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되었노라!"
2. 고구려의 정신으로
대조영은 처음 나라 이름을 <지닝>이라고 하였다. 북쪽 지방의 돌궐까지도 포섭하고 서쪽의 랴오허 강까지 영토를 넓힌 뒤 국호를 <발해>라고 고치고 이름도 고왕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자 당나라는 할 수 없이 대조영을 ‘발해의 왕'으로 승인하여 주었다. 이때가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인 713년이었다.
발해는 이처럼 그 나라의 이름과 영토, 그리고 백성들까지도 옛날 고구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명예를 되찾겠다는 대조영의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일본에도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외교 문서에도 고구려를 뜻하는 ‘고려의 왕'이라고 명기하여 발해는 옛날 부여나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3. 발해의 흥망성쇠
제2대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북부여를 계승한 두막루를 병합하고 흑수말갈을 압박하였다.
무왕은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면서 당나라와 대항하였다.
제3대 문왕은 연호를 <대흥>으로 바꾸었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 상경 용천부, 동경 용원부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교역을 도모하고, 당나라에도 사신을 수시로 파견하여 친당 외교를 폈다. 그러나 신라와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문화와 당나라 문화를 수용한 문화 국가였다. 발해의 귀족이었던 <열만화>는 발해의 유민들을 모아 압록강 부근에 정안국을 건국하였고, 제2대 <오현명>은 거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발해는 한반도 남쪽의 통일신라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예전의 고구려보다도 오히려 더 사이가 나빴다. 그런 사례는 8세기 초의 기록에 신라가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반대로 통일신라에서는 북쪽의 말갈이 옛날의 고구려를 편들어 신라를 자주 침략했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발해는 옛날 고구려처럼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대동강 부근까지 차지하고 통일신라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신라는 제33대 성덕왕 20년인 721년에 함경남도 영흥군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는 제15대 <대인선> 때인 986년 거란의 2차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5명의 왕이 220년간 통치한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4. 해동성국
발해는 지리적으로 고구려의 옛 터전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왕의 직함에서도 끝에 왕자를 붙였다.
대조영 자신을 고왕이라고 하고 그 뒤에도 문왕, 무왕, 선왕, 애왕 등 모두가 끝에는 왕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다. 이런 일들은 문화와 풍습의 제도가 옛날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는 전국을 경, 부,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경은 작은 서울이라는 의미로 직할 도시의 성격이고, 부는 우리나라의 지방 각도 명칭과 같다.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 때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맞았다. 이때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을 갖추어,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라가 번창하였다. 군사 제도도 정비하여 남자는 누구나 군인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10만 명의 군사를 확보해 놓았다.
5. 외교와 학문
발해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유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정서> 등 여러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많은 절들을 세웠다.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주자감>을 설치하고 유학을 장려하였다. 서적을 보관하는 <문적원>도 세웠다.
발해의 서울인 <상경용천부>에서는 꽃잎을 새긴 기와등이 출토되었다. 더구나 뚱징청에는 거대한 성 터, 대궐 터, 절 터 등이 남아 있다.
궁궐은 온돌방 구조로 오늘날과 같은 난방시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이 출토되었다. 두만강 근처의 훈춘에서도 성 터, 궁궐 터, 절 터가 발견되고 돌로 만든 불상도 나왔다.
[고대사 링크 목록]
2. 고조선, 단군설화, 위만조선, 한사군, 부족국가시대
3. 고구려의 건국과 전성기, 고주몽의 건국 신화, 유리왕과 황조가
4. 낙랑과 호동 (자명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불교의 전래
5. 살수대첩과 을지문덕,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천리장성
7. 백제의 건국~멸망, 계백의 황산벌 전투, 의자왕과 낙화암의 전설
8. 백제의 무령왕릉, 사비성고분, 부흥운동, 중국,일본과의 교역, 건축과 미술
9. '신라' 국호의 유래, 삼국사기로 본 시대 구분, 성골과 진골의 차이
10. 신라의 영토확장, 화랑도와 세속오계, 선덕여왕의 일화, 백결의 방아타령
11. 신라의 통일, 왕권 강화와 흥망성쇠 과정, 불교 유적(불국사, 석굴왕), 최치원의 등장
12. 후삼국시대 양길의 봉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13.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220년 간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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