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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자겸의 난
2. 묘청의 서경천도설
3. 유흥만 즐긴 의종
4. 무신들의 다툼
5. 무인시대의 권력 양상
6. 정중부의 중방 정치
7. 농민과 노비의 반란
8. 만적의 난
1. 이자겸의 난
고려는 12세기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 휘말렸다. 제17대 인종 초기로부터 제23대 고종 즉위 전후에 이르는 약 90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 확실히 한 획을 그을 만한 특징을 지녔다.
이때는 고려 전기 이래의 정치조직 자체에 포함된 문신 귀족 전성기속에서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부패 고리까지 터지면서 그 다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흐름은 먼저 개경의 부패한 귀족사회 자체에서 발생하였다. 그 한복판에 이자겸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서 서경에서 개혁 정치를 꿈꾸던 묘청 일파의 천도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상호간의 항쟁을 불러왔다. 그러한 항쟁은 수차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귀족 문화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종, 의종 때에 연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그 반란은 경원 이씨 세력의 절정을 이룬 이자겸이 일으켰다.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떠오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휘둘렀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황후가 되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제16대 예종과 제17대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이다. 그 세력을 발판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왕실과 중복된 혼인 관계를 맺은 이자겸은 왕보다 권력이 더 강했고, 재산도 임금보다 더 많았다. 내외의 요직에 일족을 앉히고 반대 세력을 쫓아내면서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자겸의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엄청난 횡포를 부렸다.
인종은 이자겸의 횡포를 증오한 나머지 1126년 김찬. 안보린, 최탁, 오탁 등 측근 세력을 결집하면서,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1126년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괴상한 말을 믿고,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십팔자(十八子)는 十자 아래 八자를 쓰고 그 아래에 子글자를 쓴 것을 풀어놓은 것으로 이를 합하면 이(李) 자가 된다. 고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은어였다. 이씨는 곧 이자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 욕심으로 척준경에게 지시하여 군사행동으로 왕을 가두고 왕의 측근 신하들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나 이자겸은 그 일당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되고,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제거되니 귀족의 발호는 일단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 묘청의 서경천도설
왕권의 쇠약과 귀족세력의 강대로 빚어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자겸 일파로 개경 귀족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 백수한, 정지상 등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천도하여 새 왕궁인 대화궁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은 고려 초부터 북진정책과 관련되고 개정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그러나 개경을 세력 기반으로 하며 전통을 존중하는 김부식 등 재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민생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정치개혁과 대외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크게 번졌다.
묘청 세력은 서경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1135년 제17대 인종 13년 서경에서 유참. 조광 등과 더불어 대위국을 세워, 연호를 천개로 정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칭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개성 조정에서는 묘청 반대파의 수장인 김부식에게 서경 정토 명령을 내렸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정지상. 백수환 등을 죽이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조광은 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묘청, 유참 등의 목을 베어 항복의 뜻을 표했으나 김부식이 거절하자 끝까지 반항하였다.
1136년 인종14년 2월 평양성이 함락되어 난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서경 세력의 정권 장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묘청과 김부식>
이자겸의 난이 평정되고 새롭게 등장한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금과의 사대주의를 배척하였다. 김부식은 묘청과는 반대로 보수적인 방향을 지향하며 금나라와 사대주의 관계를 맺었다.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일에 앞장서서 묘청의 진보파를 숙청하였다. 그리고 역사는 금나라의 후예인 청나라가 조선을 유린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굴욕을 당한다.
3. 유흥만 즐긴 의종
1170년 8월 30일, 제18대 의종 24년 당시 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 유흥을 즐기기 위해 보현원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이때 정중부 역시 무신으로 왕을 수행, 보현원까지 따라갔다. 한참 즐기던 중에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뇌 등에게 모욕을 받고 구타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환갑이 다된 노장군 이소응이 한 젊은 군졸과 씨름을 하다가 졌다. 이를 본 문신 한뇌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욕을 퍼부었다.
" 야! 늙은 무인! 대장군으로서 어찌 군졸놈한테 넘어가느냐? 하는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좀도둑 아닌가!"
한뇌의 말에 문신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저 이소응의 꼴을 봐라!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무신 놈들은 놀고먹어 비곗살만 쪄서 힘을 못 쓰는구나!"
이를 본 정중부는 달려가 한뇌의 멱살을 잡고 힘차게 한 대 후려쳤다.
"네이놈! 이소응 장군은 아무리 무관이자만 품계가 3품 대장이시다. 너 따위 6품짜리 젊은 놈이 손찌검을 하다니 무엄하도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왕은 정중부를 달래주었다. 그러나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 등 무신들은 그동안 참고 있던 불만을 터뜨렸다. 이를 계기로 무신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4. 무신들의 다툼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집단적인 도적이 전국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최충헌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와 함께 무인들의 군웅시대가 열리고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 사이에 세력 암투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 가는데 몰두하고 저마다 사병을 길러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 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1196년에 최충헌과 그의 동생 최충수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하면서 무인정치의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최충헌은 최 씨 정권을 구축하고 그의 아들 최우에게 그 권력을 이양하면서 더욱 강화하여 무인정권의 기 구가 정비되었다.
최우는 정방, 서방을 설치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을 더욱 확대하여 최씨 정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교정도감을 존속시켜 권신들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교정별감의 관직도 권위를 세워 놓았다.
최 씨 집권기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문신을 친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최우와 최항, 최의 시대에도 문신 친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1258년, 최항은 마침내 대사성 유경, 낭장 김인준 등에 의해 살해당했고 국정을 고종에게 돌리니 최 씨의 60년 정권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5. 무인시대의 권력 양상
무신정변은 문벌과 문신들의 주도와 무신에 대한 차별에 반기를 든 정변으로, 무신들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이전부터 고려사회는 상층으로부터 하층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으며, 무신정변 이후에는 그 변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무신들의 집권이 확고해지자, 무신과 문신간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 진행되면서 통혼이 이루어졌다.
특히 집권 무신세력들과 기존의 문벌들 사이 에서 적극적으로 통혼이 추진되었다. 이는 집권 무신세력들로서 문벌층의 권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문벌층으로서도 집권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 나가는 길이었다.
이로써 지배층의 상층부는 집권 무신세력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문벌층이 재편성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처럼 변화된 지배층 상층부는 전기의 문벌층에 비해 혈통적인 가문의 권위가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일부 남아 후기 지배층의 상층부를 이루는 권문세족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최고계층 내에서 폐쇄적으로 혼인하는 계급내혼적(階級內婚的) 단위에는 급격히 권세를 잡게 된 하층 출신들이 상당수 새로이 포함되었는데, 그 내부 구성원들의 상승과 몰락이 빈번한 와중에서 이러한 신흥세력의 비중은 서서히 확대되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한 정치세력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인물들은 무인집정과 같은 신흥세력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6. 정중부의 중방 정치
정중부는 정변 이후 형식적으로는 이의방과 권력을 나누었지만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거두로 살아갔다. 무신들은 정권을 잡고 중방에 모여서 그때그때 당면 문제를 처결하였는데, 중방은 원래 요나라의 침략기에 장수들이 모여 군사 작전을 상의하거나 결정하던 장소였다.
무신정권의 등장 이후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1173년 명종 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은 장순석 등과 함께 정중부, 이의방을 치고 의종을 다시 세우려고 왕을 거제에서 경주로 모셔 왔다. 그러나 실패하여 모두 처형되었고 의종도 심복 이의민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1174년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병사를 동원했으나 실패했다. 정중부는 반란을 잠재우고 그 와중에 이의방도 살해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 뒤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권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정중부는 용모가 우람하고 얼굴빛이 백옥 같았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위풍이 늠름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중부는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참수되어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렸다.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그가 역적으로 몰려 단죄됨으로써 그의 가계나 족보도 실전(失傳)되었다.
7. 농민과 노비의 반란
제18대 의종 때는 왕실의 사치와 행락 놀이로 국가 재정이 파탄 상태가 되자 그 돈을 모두 농민들로부터 거둬들였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세력 다툼에 자극되어,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 수탈에 항거하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하게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제19대 명종 2년 북계의 창주, 성주, 절주 등지에서 지방 관리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의 남은 무리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 남쪽에서는 1176년 명종 7년에 공주 명학소에서 방이, 망소이가 반란을 일으켜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손청과 이광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182년에는 전주에서 군인과 관정 노비들이 관리의 가혹한 배 만들기 부역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서, 지방 관리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다.
1193년 명종 23년 김사미, 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강릉의 농민 반란군은 경주의 반란군과 합세하였고, 진주의 노비 반란군은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폈다.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경주의 반란군은 운문, 울진, 초전 지역의 반란군과 연합하였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서 10여 년간 세력을 떨쳤다. 드디어 수도인 개경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8. 만적의 난
제20대 신종 때인 1198년 전국에서 일종의 노비해방 운동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규모가 가장 컸고 목적이 뚜렷했던 시위가 '만적의 난'이었다.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반란이었다. 만적은 당시 집권 세력인 최충헌의 개인 노비였다. 그는 동료 노비 6명과 함께 개경 북산으로 올라가 노비들을 모아놓고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는 정중부의 난 이후에 그의 노비가 벼락출세를 한 사실을 예로 들고,
"왕후장상의 신분이 본래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들도 언제까지나 노비로 있을 것인가?”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밀고자의 신고로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이리하여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저져 죽음을 당하였다. 만적의 난이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시와 같이 신분 계급이 엄격한 시대에
그들이 품었던 생각, 즉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그 구상과 그들이 나타낸 투쟁 의욕은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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