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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곱 차례 항쟁
2. 무신정권의 강화천도
3. 팔만대장경의 위력
4. 삼별초의 항쟁
5. 몽골과 싸운 배중손
6. 몽골 공주를 왕비로
7. 쓰시마 정벌


1. 일곱 차례 항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였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중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금나라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그 뒤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13세기 초 강성해진 몽골족이 고려에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때 고려에 왔던 몽골사신 저고여가 일행과 함께 돌아가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거란족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1231년 침입해 왔다. 이것이 고려-몽골 전쟁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7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공을 받았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불에 타고 무너졌다.


2. 무신정권의 강화천도



그때 집권자인 무신정권의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는 일을 획책했다. 이때 문신인 유승단 혼자 반대하였으나 최우는 장기 항전을 이유로 도읍을 옮겼다. 이것이 강화천도이다.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몽골 군대들이 스스로 물러갔다. 그 뒤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1270년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고려는 비로소 개경으로 환도하고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어 전쟁은 끝났다.


3. 팔만대장경의 위력



강화도로 옮겨온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동원해 산성을 쌓고 몽골에 대한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고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였다. (국보 32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팔만대장경은 8만 4000개의 불교 법문을 16년에 걸쳐 8만 1258판에 한 자 한 자씩 새겨 판각한 것이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뱃길로 조세를 거두어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원나라로 이름을 바꾼 몽골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경주까지 침공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불태워 버렸다.

 

4. 삼별초의 항쟁



고려 조정이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는 본래 귀족 계급들의 야간 순찰대였다. 우별초와 좌별초, 그리고 몽골에 포로가 끌려갔다가 돌아온 신의군을 일컫는 말이다.


1270년 음력 6월 초, 고려 제24대 원종이 몽골과 화의를 하고 개경 환도를 단행하면서 항몽 세력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 삼별초 해산 명령을 내리고 그 병적을 압수하였다. 이에 배중손은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와 삼별초 해산 명령에 따르지 않고 야별초 지휘자 노영희 등과 함께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탈자가 나오면서 단속이 어렵게 되자 1000여 선박을 징발하여, 고려 정부의 재화와 백성을 다수 싣고  강화를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여 전남 앞바다의 진도섬에 도착하여 대몽 항전을 계속하였다.


삼별초는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진도가 함락될 때 살아남은 삼별초는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

 

5. 몽골과 싸운 배중손



배중손은 고려의 무신이며 삼별초의 지도자였다.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에서 진도로 내려온 뒤 용장산성을 행궁으로 삼은 후 승화후 온왕을 받들면서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했다. 일본과 외교도 펼쳤다.
남해 연안과 각 도서, 나주, 전주에까지 진출하여 관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다. 그해 음력 11월에는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과 몽골의 흔도가 거느린 고려-몽골 연합군이 결성되어 세 방향에서 진도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대항하였으나 그 사이에 좌군과 우군의  공격을 좌우에서 받으면서 위기에 몰렸다. 남도석성으로 옮기면서 계속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삼별초는 진도 굴포리에서 항전하다가 여몽 연합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9개월 만에 무너졌다. 배중손은 장렬한 전사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때 제주도로 건너간 일부 삼별초 군사들도 계속 버티며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 평정되었다.
이로써 삼별초는 3년여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 몽골 공주를 왕비로



고려 왕실은 원 황실과의 결혼정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오면서 또 다른 분란이 일어났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중국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킨 뒤 세운 나라이다. 고려의  왕은 제25대 충렬왕 이후 제31대 공민왕까지 일곱 명의 왕들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었고, 충선왕, 충숙왕, 충목왕 등 3명은 원나라 왕비들의 아들이었다.


왕실의 호칭과 격이 자주국가에서 제후국으로 격하되었다. 고려는 국왕에게  내리는 칭호인 태조, 혜종, 광종, 의종, 신종, 희종, 강종과 같은 조와 종의 호칭을 붙일 수 없었다. 더구나 여섯 명의 왕들은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忠)'자를 붙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충렬왕과 쿠빌라이 칸>

고려의 원종(元宗)은 몽골제국의 패권을 놓고 이루어진 쿠빌라이 칸과 아리크 부케와의 대결에서 쿠빌라이의 편을 들었고, 이후 쿠빌라이 칸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면서 고려는 명줄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영향력은 한반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이후 고려의 왕이 된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하여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다.

 

7. 쓰시마 정벌



고려 조정의 문신들은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하면서 몽골과의 강화를 다시 주장하였다. 이는 문신들이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 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그 결과로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정권을 무너뜨렸다. 김준, 임연 등 무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고려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몽골  연합군의 일본 쓰시마섬 정벌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삼별초가 진압된 뒤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의해 1274년 (충렬왕 즉위)와 1281년(충렬왕 7년)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을 이루어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폭풍우를 만나 많은 희생자를 내고 돌아왔다.


몽골은 일본 공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을 통하여 고려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를 하면서 정치에 간섭하려 했으며,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속령으로 하였다.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과 자비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몽골의 경제적 요구도고려의 농민에게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충선왕을 심양왕에 봉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를 이용하여 고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몽골의 지배에도 끝까지 왕조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그 뒤에도 일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1377년 우왕 3년, 최무선의 노력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가 제작되었다. 

 

1380년에는 금강 입구에 침입해 온 왜구 500여 척에 화포 공격을 퍼부어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성계는 육지로 올라온 왜구들을 토벌하여 완전 소탕시켰다. 이로써 왜구들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대마도는 부산과 일본 규슈 중간 대한해협의 섬으로 쓰시마 섬이라고 한다. 왜구들은 이 섬을 근거지로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과 중국 연안까지 노략질을  일삼아 왔다. 고려와 조선에서 수차례 정벌을 했다.


1389년 제33대 창왕 원년에는 박위가 이끄는 고려군이 병선 100여 척을 동원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복하고 왜선 300여 척을 불질러 버리고 포로로 끌려가 있던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했다. 

 

조선 태조, 태종, 세종 때에도 정벌했다. 세종 원년 1419년 이종무가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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