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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한 때가 1948년이야.
1945년 해방 이후 곧바로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간신히 세운 나라지. 그것도 완전한 나라가 아니라 반쪽짜리 나라었어.
그런 뜻에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건국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단다.
목차
1. 토론으로 날을 지새운 미.소 공동 위원회
2. 남북 분단으로 치닫다
3. 민족의 앞날에 드리운 먹구름
1. 토론으로 날을 지새운 미.소 공동 위원회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서울에서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어.
회의 목적은 우리 민족이 독립 정부를 세우도록 도와주자는 것이었지.
신탁 통치 문제도 토의 대상이었지만 다루어야 할 의제 가운데 우선순위에 들어 있지는 않았어.
그런데 이때 한국은 온통 신탁 통치 반대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지.
처음에는 사회주의 진영도 반탁 운동에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바꾸었어.
반탁 진영에서는 이러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해 사실상 찬탁이라며 반역자로 몰아붙였지.
그리하여 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서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
그리고 민족주의 진영은 미국을,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을 후원자로 삼음으로써 강대국 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지.
정국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소 공동 위원회 또한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기 나라의 주장을 펴는 대결의 장이 되고 말았어.
독립 정부를 세우려면 먼저 각 정당과 사회 단체가 참여해 나라의 기틀에 대해 의논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그들의 참가 자격에 대해서부터 의견 충돌이 일어난 거야.
먼저 소련 대표 스티코프 중장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단체만 참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
이에 대해 미국 대표 아널드 소장은 한국인 중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이 곧 신탁 통치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3상 회의 결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참여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어.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두 대표는 마침내 소련 쪽 주장을 크게 반영한 합의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어.
핵심 내용은 일단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찬성한다고 서명하는 단체에 한해 참여를 허락한다는 것이었지.
그래도 문제는 풀리지 않았어.
서명하는 것이 신탁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까지 포함하느냐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기 때문이야.
결국 논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지.
미 . 소 공동 위원회는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가 무기한 휴회를 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런 사태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지켜본 사람이 있었어.
바로 이승만이야.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미국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어.
그가 보기에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는 쉽게 결판나지 않을 게 분명했어.
어느 쪽도 양보할 마음이 없다면 결국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국을 반쪽씩 나누어 차지하는 것으로 결판이 나리라고 생각했지.
이런 생각 끝에 이승만은 미국편에 서서 남쪽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일에 가담해야겠다고 결심했어.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혔어.
"미.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한으로 휴회되어서 언제 다시 열릴지 기약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남북이 하나 된 정부를 세우기를 바라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쪽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세운 뒤에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수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이 이러하니 여러분도 따라주기 바랍니다."
이 말은 우리 민족 모든 구성원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어.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나라가 반으로 쪼개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하지만 이승만은 이것이 국제 정치의 현실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어.
그것은 당시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드러났어.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로 진군해서 각자 일정한 지역을 점령했는데, 차츰 소련 점령지와 나머지 점령지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어.
소련은 독일에 자기 나라 같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원했지.
그러자 미국은 독일을 소련에 넘겨줄 수 없다며 마셜 플랜이라는 정책을 만들어 독일에 경제 원조를 해 주기 시작했어.
그것을 계기로 친미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랐던 거야.
결국 독일의 동쪽에는 소련식 사회주의 정부가, 서쪽에는 미국식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방향으로 정세가 흘렀어.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이승만은 한반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내다보았어.
그래서 38선 이남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앞장 선거란다.
2. 남북 분단으로 치닫다
이처럼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국내의 각 정치 세력은 위기감을 느꼈지.
그래서 사회주의 좌파 진영, 민족주의 우파 진영, 중도 진영 모두 어떻게든 서로 합의해서 통일된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어.
미국과 소련도 그런 노력에 동참했어.
그래서 1947년에 열린 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다시금 합의를 이루었지.
소련은 이전에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에 반대한 단체라도 일단 합의문에 서명만 하면 참여를 허락한다며 물러섰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인거야.
미.소 공동 위원회는 이 합의문을 토대로 참가 단체를 접수했어.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접수를 마감하고 보니 북한에서는 36개 단체가 신청했는데 가입자 수가 거의 1,300만 명에 달했고 남한에서는 425개 단체가 신청했는데 가입자 수가 무려 5,200만 명에 달했어.
당시 남북한 총인구가 2,000만 명 남짓이었는데, 총 가입자 수가 6,500만 명이나 됐으니 실제보다 3배 넘게 부풀려졌던 거야.
소련과 미국은 단체와 회원 수를 실체에 맞게 조정하려고 했어.
그런데 서로 자기 쪽에 유리하게 조정하려 했기 때문에 결론이 나지 않았지.
그런 가운데 남한의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은 미군정을 상대로 항의시위를 벌여 나갔어.
미 군정은 그들이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며 탄압했지.
이렇게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2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아무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되고 말았어.
그러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서 해결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어.
유엔의 감시 아래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방안이었지.
총선거에서 선출할 국민 대표 수는 각 지역별로 인구 비례에 따라 정하자고 했어.
유엔은 세계 각 나라가 모인 기구이지만, 실질적으로 유엔을 이끄는 나라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안이 통과될 건 뻔한 일이었지.
이에 소련은 반대하고 나섰어.
미국이 이끄는 유엔의 감시 아래 선거를 치르면 미국 편에 선 인사들이 많이 선출될 테고, 그것은 소련이 바라던 사회주의 정부 수립과는 멀어지는 일이었거든.
그래서 소련은 남북한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한국인들이 자율적으로 독립 정부를 세우게 하자고 제안했어.
그때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진영이 장악하고 있었고 남한에서도 최소한 절반 정도는 사회주의 계열이 당선될 것이므로 전국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정부가 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야.
3. 민족의 앞날에 드리운 먹구름
그런데 그 무렵 국제 사회에서는 미국의 국력이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어.
따라서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려는 미국을 막기에는 소련의 힘이 부족했지.
결국 유엔에서는 중립적인 9개 나라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구성하고, 이들의 감시 아래 전국 300개 선거구에서 300명의 국민 대표를 뽑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어.
300개 선거구 가운데 100개는 북한에, 200개는 남한에 배정되었지.
소련은 이러한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했어.
그래서 1948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들어와 북한 지역으로 가려고 하자 38선에서 막았어.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엔도 어쩔 수 없었지.
결국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서 선거가 가능한 38선 이남에서 먼저 총선거를 실시하기
로 했어.
이것은 민족이 둘로 갈라지는 최악의 사태였어.
그래서 김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반대했지.
특히 김구는 "38선을 베고 누워 죽더라도, 허리가 잘리는 민족의 비극은 막아야 한다."며 호소했어.
김구는 남북한이 대결을 풀고 서로 협력해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직접 북한을 방문했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을 만나 반드시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설득했지.
분단으로 가는 반쪽 선거를 찬성하는 세력은 이승만이 이끄는 소수 세력뿐이었어.
하지만 그들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에 힘입어 반쪽 선거를 밀어붙였어.
결국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어.
이 선거가 민족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에게는 처음 맞아하는 민주주의 선거였어.
이를 ‘5.10 총선거'라고 한단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조선 왕조 아래에서 살다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어. 그리고 일제가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맛본 거야.
어찌 됐든 많은 사람들이 감격했지.
그래서 투표율이 무려 95.5퍼센트나 됐어.
미 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국민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강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투표율이었지.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애타게 갈망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단다.
선거 결과를 보면, 총 당선자 198명 가운데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후보가 85명으로 가장 많이 당선되었어.
그다음이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소속 후보로 55명이 당선되었지.
이렇게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은 그만큼 이승만을 반대하는 샤람이 많다는 것을 뜻했어 .
투표에는 참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북 분단에 대해서는 우려가 깊었던거야.
당선된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어.
그리고 7월 17일,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인 헌법이 공포되었지.
이 헌법에 따라 제헌 국회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어.
이렇게 해서 1948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한 지 3년 만에 독립 정부를 세웠어.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의 절반이 잘린 분단된 나라였어.
많은 이들이 이 점을 안타까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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