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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윌 15일, 드디어 우리 민족은 일제 지배의 암흑에서 벗어났어. 일본이 2차 세게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1910년부터 35년 동안 이어서 온 식민지 지배가 끌장난 거지. 그러나 마냥 기뻐야만 했던 그날이 결과적으로는 우리 민족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시작되는 답이 되었단다.

 

 

목차 

1 일제의 암흑에서 해방되다

2.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김구

3. 맨손에 빈털터리 신세 이승만

4. 소련에 발목 잡힌 김일성

 


1 일제의 암흑에서 해방되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무렵,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어.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특별 발표를 한다고 했거든. 
방송국 관계자를 비롯한 극소수 사람들은 그것이 일본의 항복 선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그 내용을 짐작하지 못했어.


드디어 정오가 되자 아나운서가 청취자들에게 일어설 것을 요구했어.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천황의 말을 들을 때는 경건한 자세를 갖춰야 했지. 라디오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차려 자세로 고개를 숙인 순간,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일본어인 데다 잡음이 많아서 한국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어.


하지만 첫대목은 이랬어.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침통해하는 서울의 일본인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살핀 결과 비상조치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여기 충량 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국에 대하여 그들이 제시한 공동 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가 의아해했어. 
천황의 발표가 끝나자 한국인 아나운서가 그 뜻이 무엇인지 밝혀 주었어.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고 말이야. 
방송을 들은 한국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어. 


일제가 망하고 한국이 독립하게 됐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도대체 이 사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조차 못한 채 8월 15일은 그렇게 흘러갔어. 
이튿날 서대문 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풀려 나오고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이제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발표하자, 그제야 사람들은 해방을 실감하기 시작했어. 


너도나도 장롱 깊숙이 숨겨 놓았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 
서울의 종로와 서울역,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외쳤단다.

 



2.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김구


사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은 일제에 고분고분 지배당하고 만 있지는 않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라 안팎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 
그 가운데 해방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을 들자면 김구, 이승만, 김일성이라고 할 수 있어.


김구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고, 이승만과 김일성도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어.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우리 민족이 해방되던 8월 15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을 살펴보면 해방의 그날이 왜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단다.


먼저 김구의 행적을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당시 김구의 직책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었어. 
오늘날의 대통령과 비슷한 지위였지. 
그러나 정작 해방이 이루어진 순간에는 임시정부도 김구도 그러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립운동 세력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싸운 탓에 사실상 임시 정부가 독립운동을 대표하지 못하는 처지였다는 데  있었어.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어.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한국 청년들이 늘어났어. 
그 가운데 장준하라는 청년도 있었지. 

 

그러나 장준하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 찾아간 임시 정부의 실상은 그를 실망시켰어.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분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모습을 보고 장준하는 "임시정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라고 울분을 토했단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김구 주석은 나름대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가 보기에 일본은 이미 패색이 짙었지. 
따라서 우리도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전쟁에 참여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한반도를 우리가 직접 접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

 

이를 위해서 김구는 이미 1940년에 한국광복군을 조직했고, 일본에 국가 대 국가로서 선전포고를 했어. 
하지만 전투에 참여할 여력은 없었지. 
그런데 1945년에 들어서자 전체는 빠르게 일본 패망을 향해 흘렀어. 

 

김구는 중국에 있는 미국의 특수 부대인 oss(omce of Strategic Sevices : 미국 전략
사무국. 나중에 CIA, 곧 미국 중앙정보국이 된다.)와 협력하여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았어.
광복군 정예 요원에게 특수 훈련을 시켜서 비행기나 선박을 이용해 한반도로 직접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었지. 

 

특히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경우, 우리 광복군이 함께 들어가서 한국인들을 이끌고 본토 수복 작전에 앞장서겠다는 뜻을 미군에 전하기도 했어.
이를 위해 1945년 5월부터 중국 시안에서 이청천 장군이 지휘하는 광복군 요원들이 oss 도너번 소장의 지도 아래 훈련에 들어갔어. 

 

이때 선발된 광복군 요원은 50명으로, 상륙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만한 규모는 안 되었어. 
하지만 한국광복군이 직접 참전한다는 것이 중요했지. 
당시 임시 정부는 일본군에 쫓겨 충칭으로 옮긴 상태였지만 김구는 시안으로 찾아가 광복군의 훈련을 지켜보았어.

 

그만큼 마음이 다급했던 거야.
그런데 훈련 도중 일본 본토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이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뉴스를 접했어. 
순간 김구는 눈앞이 캄캄해졌어. 

 

우리가 전쟁에 참가하기도 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해방이 남의 손으로 이루어진 셈이 되었기 때문이지.
김구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여러 해 동안 애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3. 맨손에 빈털터리 신세 이승만


한편 그날 이승만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 무렵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맡고 있던 직책은 주미외교 위원부 위원장이었어. 말하자면 미국에서 임시 정부를 대표해 외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미국에서도 우리 독립운동의 상황은 중국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며 대립하고 있었지. 

이승만은 그러한 여러 파 가운데 하나를 이끄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어. 

 

더구나 임시 정부 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승만은 일찍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뽑혀 독립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지만 그 뒤로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었어.

국제 연맹에 한국통치를 위임하겠다는 편지를 보내는 등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 임시 정부 구성원들을 화나게 했거든.

 

결국 이승만은 1925년에 탄핵을 받아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쫓겨났어.
이후 그는 미국을 본 거 지로 삼아 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도 사이가 벌어져 세력 다툼을 하게 된 거야.

 

임시정부는 그래도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겨 1941년에 주미 외교 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어. 

그가 맡은 임무는 국제 사회가 우리 임시 정부를 승인하게 하는 것, 임시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얻어 내는 것 따위였어.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

 

이런 가운데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50개 국가의 대표들이 모였어. 

1, 2차 세계 대전이 잇달아 발생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국제 연맹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국제기구를 만들기 위해서였지
이 국제기구가 오늘날의 유엔(국제연합)이야.

 

이승만은 이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어.
그러나 미국 등 회의를 주도한 국가들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나라들만 자격이 있다며 허락해 주지 않았어.

이승만은 발을 동동 구르며 각국 외교관들을 접촉해 사정했지만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

 

그러던 중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어.

이승만은 급히 귀국을 서둘렀지만, 미국은 그를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이 아닌 단지 한 개인의 신분으로만 인정해 주었어.

그러니까 해방의 그날, 이승만도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 못했던 거야.


4. 소련에 발목 잡힌 김일성


한편 김일성은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펼치고 있었어. 

그러다가 1942년에 소련 땅 하바롭스크 근거지를 옮겨야 했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바람에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힘이 부쳤기 때문이야.

 

소련으로 넘어간 이들은 소련군의 지휘를 받는 ‘88 여단'이라는 부대로 편성되었어. 

그러자 이들의 처지가 곤혹스러워졌어.

원래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고 있었어.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

 

소련이 같은 공산주의자인 중국 공산당보다는 공산당과 대결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야. 

소련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그런 소련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 있었어. 

 

 

이런 판국에 한국 독립군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넘어갔으니 처신하기가 조심스러웠던 거야.
하지만 김일성은 자기들 처지를 비관만 하고 있기엔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1945년 초, 다시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돌아왔어.

그리고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부대를 편성했는데, 이것이 조선공작단이었어.

일본이 패망할 분위기가 짙어지자 조선공작단은 전쟁에 참가하여 만주에서 국내로 직접 진격해 들어갈 계획을 세웠어.

육지로 진격하면 더딜 것이라 보고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내륙 깊숙한 곳에 침투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일 계획도 세워두었지.

 

그러나 김일성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어.

중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가깝게 지내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못마땅해했고, 이를 알고 있던 소련이 조선 공작단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야. 

 

 

그 무렵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련의 고위급 정치가 주다노프를 만나고, 극동군 사령관인 스티코프와 인연을 맺어 두는 등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

따라서 그가 소련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처지였지.

 

이렇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8.15 해방을 맞이한 김일성은 허탈했어. 

진작 국내로 진격해 들어갔더라면 승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김일성의 정치적인 위상은 김구나 이승만보다 훨씬 낮아서, 독립운동 전체를 대표할 인물은 아니었어. 

 

따라서 김일성은 이제까지 해 온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중요하다고 섕각했지. 

그런 마음으로 9월 19일 원산항을 거쳐 귀국했어.


이처럼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이 원하던 방향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단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노력해 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에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는 못했어.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해방인 만큼 혼란은 피할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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