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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한 제국의 탄생
2. 제국의 성립
3. 헤이그 특사
4. 식민통치의 족쇄

 

1. 대한 제국의 탄생



고종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그 뒤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이란 국호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 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융희 4년 8월 29일까지 13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리는 근대국가이다.

대한제국의 공식 약칭은 대한 또는 한국이다. 때때로 대한민국과 구별하고자 구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추친 운동과 민권 운동이 활발했으며, 정부 주도의 근대적인 개혁인 광무개혁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근본적인 개혁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으로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독립협회는 수구파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이 시기에 서구의 문물과 사상이 더욱 쏟아져 들어왔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 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이다. 이것은 ‘삼한'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한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아울렀으므로 대한이라 하였다.

여기에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더 붙여 대한제국이 되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한제국이라고 한 표기에는, 민족다운 자긍심을 참작한 측면도 일부있다. 왕국이었던  조선 시대와 달리 나라의 위상이 제국으로 높아진 것이었다. 그 뒤에도 조선은 여전히 부활 논의가 많았으며 지속적으로 대한제국 국민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마침내 독립에 성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민주국가로 변경함에 따라 대한제국은 완전히 없어졌다.

2. 제국의 성립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외세로 말미암아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1897년 광무 원년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그해 8월 17일 광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해 10월12일 고려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에서 하늘의 상제에게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제정 러시아와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다. 과거  청나라에 사대하던 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일을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개혁의 상징 독립문>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주의로 청의 사신이 오면 영은문에 마중 가고 모화관에 영접을 했다. 고종 황제는 개혁의 일환으로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그곳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국민 모금 행사를 통해 모인 기금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문은 파리 개선문을 본뜬 모습이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은 자주적 중립 외교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친일파와 친러파 관료들의 대립과 열강 세력들의 압박 등으로 그 실효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 제국은 이어서 1904년 11월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였고, 1905년 2월에 일본 제국  시마네 현에 일방적으로 편입시켰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1905년 일본과 제2차 한일 협약을 맺게 됨으로써 외교 권한은 박탈당했고, 일본 제국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성립하기까지는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 사이에 정부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독립협회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데 수구파는 전제 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어 백성의 참정권을 주장했고 국회의 설치로 국민대표자를 뽑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참정권 주장과 국회 설치 주장을 반역으로 규정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 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광무 2년 11월 중추원 관제 개편을 공포했다.

그러나 수구파는 이에 익명서 사건 (독립협회가 공화정치를 실시하려고 한다는 벽보)을 명분 삼아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하
고,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행정부를 수립하였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동안 순탄치 못한 과정을 거쳤다.

<만민공동회>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행한 정치 활동 시민, 단체회원, 정부 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 집회이다. 1898년 정부의 친러적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대하여 일어난 집회로 자주 외교와 국정 개혁을 주장하는 등 성과를 보였으나, 보수 세력의 거짓 모함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등 탄압을 받게 되었다.

 

3. 헤이그 특사


고종은 비밀리에 밀서를 작성해 열강세력에 을사늑약(늑약:억지로 맺은 조약) 의 불법적 체결과 무효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특파하였다. 일본의 강제 침탈을 만국 대표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한 것이다.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이었다.

"제2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강압적 협박으로 체결된 것이며 대한제국 황제의 자주적 입장에서 승낙한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무효가 되어야 한다." 이를 헤이그 특사 사건이라고 그러나 일본의 끈질긴 방패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준열사는 그 자리에서 분사하여 서양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다.

<이준 열사>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철,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 대표 이준 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 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일본은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삼아 고종을 7월 강제 퇴위시켰다. 순종이 제27대 왕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로 정하였다. 일본은 순종이 즉위한 직후  한일 신협약을 7월 24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다.

이를 차관정치라고 한다.
통감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과 가담하여 전국적인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4. 식민통치의 족쇄


일제는 1907년 8월부터 한 달 사이에 군대를 강제로 해산키고, 1909년 7월 12일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교도 행정에 관한 업무를 빼앗았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며 저항을 하자 일본은 대토벌 작전 명령을 내리고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 8월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을 모두 강탈하였다. 이 조약 체결과 동시에 한반도는 땅은 있으되 나라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것을 경술국치라고 한다.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반도에서 약 4,000년간 지속하던 우리나라라는 명칭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왕의 칭호는 1945년까지 존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을 식민통치 지역으로 편입하였다. 그 이후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사 읽을 거리]

(조선사) 1. 조선의 건국 - 한양천도, 무학대사, 함흥차사 이야기

(조선사) 2. 새 역사 500년 - 조선 시대의 구분

(조선사) 3. 조선 초기 - 왕자의 난, 사대교린 정책, 세종의 업적, 단종애사, 사육신과 생육신

(조선사) 4. 붕당정치와 당파싸움, 무오사회, 갑자사회, 기묘사화, 금삼의 피, 임꺽정의 출현

(조선사) 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사) 6. 광해군 폐위과 인조반정, 삼전도의 굴욕, 세도정치, 사도세자, 홍경래의 난과 김삿갓

(조선사) 7. 복잡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조선사) 8.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사건

(조선사) 9. 대한제국의 탄생과 멸망, 헤이그특사, 한일합방과 식민통치

(조선사) 10. 광무개혁, 단발령, 을사늑약

(조선사) 11. 문맹퇴치 운동, 브나로드(계몽)운동, 한국어 사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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