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목차

1. 사림들의 횡포
2. 치열한 당파 싸움
3. 금삼의 피
4. 의적의 출현

 

 

1. 사림들의 횡포

 

제9대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홍문관을 설치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면서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도 완성했다. <경국대전>을 간행하여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다.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기존 대신인 훈구와 신진 관료세력인 사림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으며, 이에 따른 전반적으로 사회가 어지럽고 혼탁하였다.

제14대 선조 때에는 마침내 사림들이 정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들은 계파 간에 대립하면서 결과적으로 붕당을 형성하여 국론의 통합에 큰 걸림돌로 등장하였다.


16~17세기에는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인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났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

제21대 영조와 제22대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 기용으로 탕평책을 실시했다. 19세기의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제26대 고종 때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통상수교를 거부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밀려나고 민씨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2. 치열한 당파 싸움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제10대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대량 숙청되었지만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11대 중종 때의 기묘사화에 또 대부분이 숙청되었고 제12대  인종 때에 잠시 등용되었다. 

하지만 제13대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훈구파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뒤 제14대 선조 때 비로소 사림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쪼개지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신진 사림들은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 속에서 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 때에 이들을 다시 등용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림들 사이에서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고질적인 당파싸움이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하여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일으킨 사건이다. 중종반정에 의해 연산군이 귀양을 가고, 왕으로 추대된 제11대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데 주력하였다.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까지도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 사림들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그 뒤에 외척 세력이 새로 등장하여 중종과 연달아 갈등을 일으키면서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제13대 왕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벌어졌다. 그로부터 12년간의 섭정 기간 중에 정국은 상당히 문란해졌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제14대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복권되었다. 훈구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직을 없애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뒤에 사림들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김효원을 지지 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생긴 것이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두 파의 감투싸움에서 비롯되었다. 선조는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수시로 뒤바뀌는 일이 잦았다.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면서 당쟁을 벌였다.


3. 금삼의 피


조선 제9대 성종의 윤비는 1474년에 연산군을 낳고, 폐비가 되어 1482년에 사약을 받았다. 그때 피 묻은 적삼을 친정어머니에게 주며 훗날 연산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연산군은 왕이 된 뒤 임사홍을 통해 피 묻은 적삼을 전해 받고 어머니가 쫓겨나 죽음을 당한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1498년에 무오사화를 1504년에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신하를 포함하여 성종의 후비들과 그 친족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성종 후궁인 엄, 정 두 숙의(淑儀)와 그들의 아들들도 태형을 쳐서 때려 죽였다. 윤비 폐위 사건에 찬성한 신하 10여 명도 처형시켰고, 이미 죽은 한명회, 남효온 등 8명은 무덤  속의 시신을 파헤쳐 뿌리는 부관참시를 저지르고 기생과 사대부 여인들을 능욕했다. 이를 나무라는 할머니 인수대비마저 매를 쳐서 죽였다. 뒷날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금삼(錦衫 비단으로 만든 적삼)의 피>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썼다.

 

4. 의적 임꺽정의 출현


조선 제13대 명종 때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사람으로 임거정, 임거질정, 임꺽정 등으로도 불렸다.


1559년 명종 14년 때부터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탐관오리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고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숨겨줘서 위기를 피했다.

 

1560년부터 점차 세력이 약해졌고, 1562년 음력 1월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황해도 구월산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 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로운 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선사 읽을 거리]

(조선사) 1. 조선의 건국 - 한양천도, 무학대사, 함흥차사 이야기

(조선사) 2. 새 역사 500년 - 조선 시대의 구분

(조선사) 3. 조선 초기 - 왕자의 난, 사대교린 정책, 세종의 업적, 단종애사, 사육신과 생육신

(조선사) 4. 붕당정치와 당파싸움, 무오사회, 갑자사회, 기묘사화, 금삼의 피, 임꺽정의 출현

(조선사) 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사) 6. 광해군 폐위과 인조반정, 삼전도의 굴욕, 세도정치, 사도세자, 홍경래의 난과 김삿갓

(조선사) 7. 복잡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조선사) 8.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사건

(조선사) 9. 대한제국의 탄생과 멸망, 헤이그특사, 한일합방과 식민통치

(조선사) 10. 광무개혁, 단발령, 을사늑약

(조선사) 11. 문맹퇴치 운동, 브나로드(계몽)운동, 한국어 사용금지

 

 



 

반응형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