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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민족 교육의 새 바람
2. 문맹 퇴치 운동
3. 국민 계몽 운동
4. 한국어 사용 금지


1. 민족 교육의 새 바람


조선의 신교육은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본격화하였다. 고종이 단발을 결심한 배경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위생에 편리하고 머리 감기가 쉬운 이유를 들어 고종에게 단발을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고종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단발령 시행에 협조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선교사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신교육을 받을 수없게 하겠다고 하여 백성의 단발 참여를 유도하였다.

신교육의 보급 요람인 신식 학교에 가려면 먼저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이다. 신교육 자체가 국민에게 많은 저항을 받았다.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그 머리털 자르는 일 때문에 자기 아들을 신식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런 일은 실제로 대구의 일등 거부였던 장길상의 집안에서도 일어났다. 장길상은 자기 아들 하나가 신교육을 받고자 대구에서 한성으로 올라와 상투를 자른 일을 두고 불효와 난봉 자식이라며 분노하면서 학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장길상은 조선의 문신이며 일제 강점기의 사업가였다. 경북 선산 출신으로 형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며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 대한제국 고종 때 사마에 합격하고  규장각 직각 (종 6품의 관직)을 역임했다.

1912년 대구의 일본인 자본가들이 선남 상업은행을 설립할 때 자본을 투자하여 금융자본가가 되었다. 이 무렵 대구의 한국인들이 일반 은행인 대구은행을 설립할 때도 자본을 투자하여 대주주가 되었다. 동생 장택상은 대한민국에서 수도경찰청장과 국무총리 등을 지냈다.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 교육 운동도 전개되었다. 개신교 계열 학교들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천주교 계열 학교들은 1920년대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와 북도, 함경남도와 북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종교 계열 학교들은 영어, 라틴어, 서양식 기계기술, 수학, 물리학 및 세계사, 성서 구약과 신약 등을 가르쳤다.

조선의 교육기관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어 다르다. 중앙에는 최고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에 해당하는 4학(四學)이 존재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소과인 생진과에  합격한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4학은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인데 흔히 학당이라고 했다.

지방의 중등교육 기관에는 향교가 있었다.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기능으로 했다. 각 부, 목, 군, 현에 하나씩 있었는데,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하였다. 초등교육 기관에 해당하는 서당이 있었는데,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사설 교육 기관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자학 중심의 유교 사회였다. 불교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철저한 견제를 받았으나 왕실의 개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신앙으로 이어졌으며, 민간 신앙은 민중들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천주교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으로 탄압받았으나, 19세기 말부터 이러한 종교적인 탄압은 사라졌다. 특히 북간도에서는 민족학교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가 개교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을 만들고 무장 투쟁을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어 민족운동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13도 의군과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광복군이 수립되고, 후에 한족회 중앙 총회와 대한국민의회 등이 수립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내외의 민족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민족사관을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뒤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반을 조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미국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결성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따로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군인 양성에 힘썼다.

 

2. 문맹 퇴치 운동


1931년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대학생들과 대학출신 인텔리들에게 이를 호소했고, 이들의 호소에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각지의 농촌으로 가서 봉사, 계몽 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
도산 안창호가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민족 운동 단체. 일제강점기의 흥사단과 흥사단우들은 안악 사건, 105인 사건, 3.1 운동, 동우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였다.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농촌 계몽운동을  주도해 나아갔다. 브나로드 운동은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여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 타파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이 운동은 학생 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 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학생 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수학을 가르쳤고, 학생 강연대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 시국강연, 위생 강연을 담당했다.

학생기자대는 고교와 전문대학생으로 구성되어 여행일기, 고향통신, 생활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도록 하였다.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등은 각종 계몽과 칼럼을 통해 실력 양성이 한국인들의 살 길이고, 실력 양성을 위해서라면 일단 문자와 말과 글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들 스스로가 앞장섰고 심훈, 나혜석, 허정숙, 최용신, 심대영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수많은 청년지사들의 동참으로 한국인의 언어, 문자를 이해하는 문맹 퇴치 운동은 크게 높아졌다.

<브나로드 운동>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3. 국민 계몽 운동


3.1 독립운동 때 무자비한 일제의 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은 독립 운동가들은 교육과 문화사업 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한 뒤에 독립이 가능하다 판단하고, 학교 설립, 신앙 활동, 계몽 활동, 언론 활동, 문화 사업 등을 추진해 나갔다. 그 중심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이광수, 신흥우, 김성수, 안재홍 등이다.

일제는 무단통치 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고,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실시하는 학교를 허용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농업학교, 공업학교 등이 설립된 것이다.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한반도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 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일본 유학의 급증과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한 학교 설립에 자극을 받아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은 조선민립대학 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한다.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더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년과 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조선총독부의 지나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 자본의 침투와 함께 신사상의 출현으로 서양 제품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1920년 초부터 김성수, 안채홍, 윤치호, 이광수, 조만식 등은 강연하고 계몽 활동을 다니며 국산 물건,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김성수와 송진우 등은 식민 치하의 한국인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 제품이 한국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의 침투를 우려하였다.

김성수는 민족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 운동에 영향을 받아 국내자본 육성계획을 세웠다.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 하였다. 김성수 등은 무명옷을 교복으로 했을 때 인촌은 옷감의 국내 자체생산 및 조달을 생각하였다.

1917년 방직 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 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던 광목 제조회사 경성직조주식회사를 인수하였다.

1918년 봄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자집의 후손 최준을 만났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다.


4. 한국어 사용 금지


1895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0년이 지난 1906년 시점에서도  초등교육 기관이 전국에 겨우 40개교 미만이었다. 양반의 자제는 서당에서 사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서당은 3000개 정도 있었지만, 내용은 한문 교육이 중심이었다. 한글, 수학, 과학 등의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시대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몰수하여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다.

총독부는 민족 교육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선교육령과 사립학교 규칙 등을 제정하여 학교의 설치와 교육 내용을 총독부가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시대에 설립된 고등교육 기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서당들의 등록이 모두 취소되었다. 없애버린 것이다 . 일본은 대신 전국에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설치했다. 초등학교는 합병 직전에는 40개 정도였던 것이 1943년에는 4271개까지 늘어났다. 대학교로는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은 30-40% 정도에 머물렀고 일본 학생들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일본어를 국어로 만들고 일본어 보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교육 당국은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그 사용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관청에서는 한국농민의 민원도 공용어인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사용을 억제하였다.

1935년부터는 한글을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제재하였다. 1938년에는 국어 상용화정책으로 한국어 교육 과정을 폐지하고, 한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고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38년 한 해 전국에 3,660여 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 농민들에게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공식적인 활동에서는 일본어만 쓰도록 만들었다. 한국인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 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수업에 임하도록 하였다. 전쟁 때에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학생까지 근로 보국이라는 이름 아래 군사시설 공사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조선사 읽을 거리]

 

(조선사) 1. 조선의 건국 - 한양천도, 무학대사, 함흥차사 이야기

(조선사) 2. 새 역사 500년 - 조선 시대의 구분

(조선사) 3. 조선 초기 - 왕자의 난, 사대교린 정책, 세종의 업적, 단종애사, 사육신과 생육신

(조선사) 4. 붕당정치와 당파싸움, 무오사회, 갑자사회, 기묘사화, 금삼의 피, 임꺽정의 출현

(조선사) 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사) 6. 광해군 폐위과 인조반정, 삼전도의 굴욕, 세도정치, 사도세자, 홍경래의 난과 김삿갓

(조선사) 7. 복잡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조선사) 8.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사건

(조선사) 9. 대한제국의 탄생과 멸망, 헤이그특사, 한일합방과 식민통치

(조선사) 10. 광무개혁, 단발령, 을사늑약

(조선사) 11. 문맹퇴치 운동, 브나로드(계몽)운동, 한국어 사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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