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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던 순간,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지?
국내에 진입한 소련군과 미군도 새로 생각이 달랐어.하지만 그런 혼란한 와중에도 상황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단다. 1945년 8윌 15일 당시 국내에서 광복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는 여운형이었어.
목차
1. 당당한 사회주의자 여운형
2. 건국을 준비하다.
3. 좌우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1. 당당한 사회주의자 여운형
여운형은 부잣집에서 태어났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재산을 물려받은 여운형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자 가족을 비롯해 집안 머슴과 종까지 불러 놓고 채권 문서와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어.
그리고 머슴과 종들에게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다."라고 말하며 신분의 족쇄를 풀어 주었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지방에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거든.
이후 여운형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비밀리에 공장으로 파고들어 조직 활동에 전념한 것과 달리 떳떳하게 나서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어.
3 . 1 운동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 정부에 참여했고, 그 뒤 소련으로 가서 공산당 지도자 레닌을 만나 독립운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
여운형은 일본 지도자들과도 거리낌 없이 접촉했어.
도쿄로 가서 일본 총리를 만나 당당하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지.
일제는 그를 감옥에 가두는 등 탄압했지만, 한편으로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으로 인정했어.
1930년대 이후에는 국내에 들어와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등을 지내며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던 일장기를 지워 버린 것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한 일이야.
이렇게 여운형은 민족주의자들은 변절해 일제의 품에 안기고,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스럽게 활동하고 있을 때 유독 공개적으로 나서서 독립운동을 한 특이한 인물이었어.
1944년으로 접어들자 해방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여운형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비밀스럽게 동지들을 불러 모아 해방에 대비한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어.
2. 건국을 준비하다.
1945년 8월 해방 직전 무렵,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가 여운형을 찾아왔어.
엔도는 솔직하게 일제가 곧 항복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는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 혼란을 수습해 줄 것을 요청했어.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고 일본으로 별 탈 없이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지.
이 말을 들은 여운형의 가슴은 뜨거운 감회로 타올랐어.
몇십 년 동안 핍박을 받으며 지내 온 시절이 드디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운형은 냉정을 되찾고 엔도에게 자신의 요구를 제시했어.
그것은 감옥에 있는 정치범과 경제범을 모두 석방할 것, 수도 서울에 3걔월 치 식량을 확보해 줄 것,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한국인의 정치 활동에 간섭하지 말 것 등이었어.
마침내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고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그동안 준비해 온 조선 건국 동맹을 곧바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약칭 건준)'로 바꾸었어.
그 무렵 국내에는 여운형을 대신할 만한 독립운동가가 없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세력이 모두 이 조직 안으로 들어와 함께 일했지.
건준은 지방마다 건국 치안대와 식량 대책 위원회를 조직해 국민들의 치안과 생활을 안정시켜 나갔어.
예정대로라면 건준의 활동이 건국으로 이어져 완전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어 있었지.
그렇지만 나라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어.
무엇보다 한반도를 접수한 미국과 소련 중 어느 나라도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어.
미국은 여운형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어.
또 미국은 한국 사람들이 아직 나라를 세울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5년 쯤 신탁통치를 한 다음에 점진적으로 독립시켜야겠다고 섕각했어.
한편 소련은 여운형이 사회주의자이긴 하지만 과연 소련에 충실한 자인지 의심이 들었어.
그래서 사회주의 이념에 더 충실한 박헌영 같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주었지.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여운형에게 힘을 보태지 않았어.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과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등은 각기 자기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러자 건준에 참여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과 김구 진영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어.
상황이 이렇게 되자 건준은 껍데기뿐인 조직이 되고 말았어.
이런 가운데 박헌영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은 미군과 협의하지 않은 채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어.
이것은 너무 섣부른 조치였지.
결국 미군이 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은 더욱 꼬여버렸어.
여운형은 이러한 어려움속에서도 꿋꿋하게 새 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어.
김구, 이승만 등 민족주의자들과 박헌영, 김일성 등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쳤지.
3. 좌우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그러나 여운형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어.
오히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 모두 그를 비판했고, 심지어 암살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어.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탄 차가 서울 혜화동 네거리를 지날 때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달려 나와 가로막았어. 그와 동시에 한 사내가 차 위로 뛰어올라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어.
총탄은 여운형의 심장과 복부를 관통해 목숨을 앗아 갔어.
범인은 극우파 테러 단체 ‘백의사'에 소속된 한지근이라는 청년으로 밝혀졌어.
여운형의 장례식이 치러질 때는 서울 시내 전체가 애도의 분위기에 잠겼다고 해.
살아 있을 때는 비록 정치적으로 불운했지만 세상을 떠난 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올곧은 독립운동가로 새겨져 있었던거야.
여운형이 세상을 떠나자 해방 정국은 더욱더 격심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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