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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모슬포항 가까운 곳에 ‘백조일손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진 공동묘지가 있단다. 130여명이 뭍힌 이곳 무덤 하나하나에는 특이하게도 비석이 없어. 여기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20일,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붙잡혀 집단적으로 총상당한 사람들이 묻힌 곳이야. 이 사람들은 무슨 죄릍 지었던 것일까?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다만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누군가가 1948년 4윌에 일어난 ‘제주 4.3 사건'에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죄 아닌 죄'였단다.

 

 

목차

 

1. 폭주하는 분단 기관차

2. 비극의 불씨가 된 제주 4.3사건

3. 무자비한 학살과 그 방관자들

 

 

 

1. 폭주하는 분단 기관차


1947년, 조국이 분단되는 상황으로 흘러가면서 남한에서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하는 세력과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험악하게 대립했어. 반대 세력의 중심은 사회주의자들이었지. 
두 세력이 얼마나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었는지는 1947년 3.1절 기념 행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어.


3.1절은 일제의 지배를 받던 우리 민족이 독립을 원하는 한마음으로 떨쳐나선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날이야. 
그 기념식을 단독 정부 찬성 측은 서울 운동장에서, 반대 측은 남산에서 각기 따로 열었어. 
그런데 기념식을 따로 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어. 기념식을 마친 양쪽의 행진 대열이 남대문 부근에서 충돌한 거야.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서로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지. 경찰이 출동해서 총을 쏘아 진압해야 했어.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죽고, 다친 사람도 많았어. 
온 민족이 하나가 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민족이 둘로 갈라져 피를 흘리며 싸웠으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이런 일은 제주도에서도 일어났어. 


제주시에서 열린 3.1절 기념 행사 때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어. 제주도 사람들은 경찰을 이승만의 하수인이라고 규탄하며 직장마다 총파업을 벌여 항의했지.그 뒤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밀고 나갔고, 미국은 그것을 지원했어.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어.


명목은 총선거였지만, 북한이 선거를 거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남한만의 반쪽 선거가 되리라는 것이 명확했지. 
5월 10일이 다가오자 사회주의 세력은 조선 공산당 조직을 동원해 총선거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나갔어.

 

 

2. 비극의 불씨가 된 제주 4.3사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당원 350여 명이 제주도 곳곳의 경찰서를 공격했어. 
그리고 이승만이 이끄는 단체인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와 서북 청년단을 습격해 주요 간부들을 살해했어. 
이승만 세력을 제거해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막아 내겠다는 의도였지. 


사실 제주도의 남로당은 이전부터 경찰의 탄압과 서북 청년단의 폭력에 많은 희생자가 생긴 터
있어. 그래서 그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한 면도 있었어.남한을 관할하고 있던 미군은 공산당이 경찰을 공격한 사건을 중대한 문제로 보았어. 이 사건을 그대로 두면 다가올 총선거를 무사히 치르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 


그래서 군대를 보내 강경하게 진압하기로 했어. 제주도에 파견된 군대는 경찰과 함께 남로당 당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어. 당원들은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웠지. 제주도 곳곳에서 군대와 남로당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어.  남로당은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갖추고 잘 훈련받은 군대를 이길 수 없었어. 그래서 산속으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쳤지. 


외지에서 온 군인들은 제주도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짜기마다 숨어서 버티는 남로당 무장 대원들을 쉽게 붙잡을 수 없었어. 남로당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산을 내려와 경찰서를 공격하고, 민가에서 음식을 얻어 돌아갔어. 한편 제주도 주민들 가운데는 남도당이 단독 정부를 반대하기 위해 활동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도와주려는 이들이 많았어.


이렇게 되자 군과 경찰은 남로당을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졌어. 남로당은 제주도 곳곳에 갑자기 나타나서 경찰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단체의 지도자들을 습격한 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연설을 하고는 산속으로 피하곤 했어. 
5월 10일이 다가왔지만 선거는 제대로 치러질 수가 없었어. 결국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 투표율이 과반수에 못 미쳐 무효 처리 되었단다.

 

3. 무자비한 학살과 그 방관자들


미 군정과 이승만은 제주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어. 이대로 가다가는 제주도가 대한민국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 형편이었거든. 그래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했어.


군 지휘관은 제주도에서 선거를 제대로 치르려면 남로당과 주민을 분리해야 한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해안에서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으로는 주민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 그리고 그곳에 군대를 출동시켜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버리기시작했어. 그러나 중산간 지역에는 남로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 가며 살고 있었어. 


군인들은 그들이 남로당 무장 대원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보았어. 그래서 중산간 지역의 모든 사람을 깡그리 죽여 없애기로 했어. 그 과정에서 남로당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노인과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 희생당했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증언이 그 때의 참상을 알려 준단다.

"새벽에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했습니다. 나는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설마 아녀자와 어린 아이까지 죽이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무조건 ‘살려줍서, 살려줍서.' 하며 빌었습니다.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 픽 쓰러지자 아홉 살 난 이들이 겁을 먹고 ‘엄마!'하며 내 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쏘았습니다. 아들은 가슴에 총을 맞아 심장이 다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 있습니다. 집은 활활 불타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가 버리자 나는 우선 총 맞은 아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마당으로 끌어낸 다음 딸을 살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그런데 등에서 딸을 내리려는데 담요가 너덜너덜했습니다. 내 옆구리를 꿰뚫은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무릎을 부숴 놓은겁니다."

제주도 곳곳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이렇게 아무 죄없이 희생당했어. 그러는 동안 육지에서는 6. 25 전쟁이 일어났어. 
이번에도 군과 경찰은 또다시 남로당이 공격해 올 거라며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남로당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한곳에 불러 모아 총살해 버렸어. 앞에서 말한 백조일손지묘는 바로 그런 과정에서 생긴 묘지란다.
돌아가신 1백여 조상의 유골을 일일이 구분할 수가 없으니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지.


정부의 공식조사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무려 1만 4천여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내고서 간신히 마무리 되었어.
1만4천 명 가운데 남로당 무장 대원은 극히 일부였고 나머지는 죄없는 주민들이었어.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를 세우느라 골몰하다가 아무 죄도 없는 주민들을 희생시킨거야.

 

제주도 주민들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은 오래도록 벗겨지지 않았어. 정부도 일부 국민도, 제주도에서 죽어 간 사람들을 공산당이니 빨갱이니 하며 몰아붙였어. 제주도민들이 외롭게 하소연했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었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주 4 . 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어. 이 법에 따라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조사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으로 사과했어. 무려 55년이 지나서야 제주도민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거란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매년 4월 3일을 ‘.4 3 희생자 추념일'이라는 국가 기념일로 정해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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