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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7일,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어. 동아일보 1면에 난 기사 때문이었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셔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 장관이 모여 한반도 처리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는데, 여기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을 했다는 내용이었어.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고대하던 국민들에게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소식이었지.

 


목차

 

1. 신탁통치라는 날벼락

2. 사상 최대의 오보

3. 공허한 반탁운동

 

 


1. 신탁통치라는 날벼락


기사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어.
12월 16일부터 미국의 번스, 소련의 몰로토프, 영국의 베빈 등 세 외무장관이 소련의 모스크바에 모여 회의를 열었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자리였어. 한반도 문제도 당연히 논의거리에 포함되어 있었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소련은 한반도를 연합국이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이른바 신탁 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하면서 즉시 독립시켜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기사 내용이었어.
신탁통치란 독립한 나라가 스스로 제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을 때 국제 연합의 위임을 받은 나라가 대신 통치하는 것을 말해. 

 

이 기사가 알려지자 그러잖아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해방 정국은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벌어졌지.
먼저 김구와 이승만 등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혔어. 
박헌영과 여운형 등 사회주의 진영도 신탁 통치 반대에는 뜻을 같이했지. 
대다수 국민들도 같은 뜻이었어. 

 

어느 누구도 해방된 조국을 다시 남의 손에 맡기기를 바라지 않았지. 
12월 말 서울 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에서 열린 신탁 통치 반대 군중 집회에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운동장 밖에까지 넘쳐났다고 해.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게 날벼락같은 소식이었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그 순간 우리 스스로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이는 한 명도 없었을 거야.
당연히 이제 우리가 주인이 되어 새 나라를 세울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니 그것은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모두 소련을 규탄하고 나섰어.


2. 사상 최대의 오보


그런데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신문들의 신탁 통치 보도는 완전한 오보였어.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도한 거야.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의 실제 내용은 이랬어.

 

신문보도와는 반대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었어. 
미국은 미국. 영국 . 중국. 소련 4개국이 앞으로 5년 동안 한국을 신탁 통치하자고 했
어. 
5년 뒤에 사정을 보고 한 번 더 연기해서 10년으로 할 수 있게 하자고도 했지. 
이에 대해 소련은 한국인들도 하여금 스스로 임시 정부를 세우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어. 

 

그리고 4개국 신탁 통치는 그 임시 정부에 도움을 주는 후견인 역할에 한정하자고 제안했어. 
후견 기간도 5년으로 제한하자고 했단다.
이렇게 실상은 언론 보도와는 정반대였어. 
오히려 소련이 더 한국인의 처지에서 발언했던 거지. 
결국 회담에서는 소련의 주장을 많이 받아들인 결정문을 채택했는 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어

 


1.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2. 남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사령부는 미 . 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인의 임시 정부수립을 지원한다.
3.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 4개국이 최고 5년 미만으로 신탁 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에 대해서는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한국의 임시 정부와 협의한다.

 


이 결정문에 따르면 미국과 소련은 먼저 미. 소 공동 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인의 임시 정부 수립을 지원하기로 한 거야. 
아울러 공동 위원회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명확한 합의를 보지 못한 신탁통치 문제를 계속 협의하기로 했어. 
곧 임시 정부 수립은 확실하게 결정한 반면, 신탁 통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거지.
사정이 이러한데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매체들은 터무니없는 오보를 실어 국민 여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했어. 


처음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실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어서 사실을 왜곡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 
어쨌거나 첫 보도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사실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흥분해서 소련을 비난했단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문이 제대로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실상을 알게 되었어. 
진실을 알게 된 사회주의 진영의 박헌영, 여운형 등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문이 우리 민족의 앞날에 아무 장애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이 결정문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해.
일부 역사 기록은 당시의 정국을 설명하면서 김구, 이승만 등 민족진영은 신탁 통치를 반대했고 박헌영, 여운형 등 사회주의 진영은 신탁 통치를 찬성했다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는 있었어도 찬성하는 정신 나간 세력은 없었어. 

 

그때 정국은 반탁과 찬탁으로 갈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 반탁과 3상 회의 결정 지지로 갈라져 있었던 거야. 사회주의 진영이 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 이유는 소련의 주장이 크게 반영되었기 때문이었지.

 

3. 공허한 반탁운동


이상한 쪽은 오히려 반탁 진영이었어. 
사실 신탁 통치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이었어. 
일찍이 1943년 카이로 회담 때부터 미국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신탁 통치를 공공연히 주장해 왔거든. 
그런데 그동안 민족주의 진영은 대부분 미국의 힘에 기대고 있었어. 
그런 현실에서 미국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었지.

 

그러나 여론은 반탁 진영 편이었어.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선명한 주장이 그들을 대단한 애국자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이러한 상황을 더욱 꼬이게 한 건 미국의 태도였어. 
반탁 진영은 미국의 속뜻과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거지만, 그들이 자기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은 아무 말 없이 눈감고 있었던 거지.

 

결국 정국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더 정확하게는 미국 진영과 소련 진영으로 갈려 싸우는 형제가 되어 버렸어. 
겉으로는 반탁이니 3상 회의 결정 지지니 하며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마음은 자기 세력이 패권을 잡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거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둘러싼 오보 소동을 겪고 난 뒤 해방 정국은 더욱더 좌우의 대립으로 치달았어.

 

오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이미 시작된 좌우의 극한 대립은 수그러들 줄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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