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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대원군의 옹고집
2. 경복궁 중건
3. 통상거절 척화비
4. 열강들의 위협, 명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5. 임오군란, 별기군 차별대우
1. 대원군의 옹고집
흥선 대원군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이름은 이하응이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 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양반, 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막고 남인과 북인을 두루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며느리로 명성황후를 간택하였으나,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뒤 며느리와 권력투쟁을 벌였고, 일본과 결탁하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쇄국정책과 천주교인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았으나 생후 수일 만에 죽자, 명성황후는 임신 중에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너무 많이 달여 먹었기 때문에 어린 원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고 전한다.
대원군은 각 지방에 있는 700여 개의 서원 가운데 47개만 남겨 놓고 모두 문을 닫으라는 철폐 명령을 내렸다. 서원은 일종의 사학기관인데 면학의 수업보다는 패거리를 만들어 사회를 어지럽 게 만든다는 여론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서원 철폐령이 떨어지자, 이를 취소하라는 전국 유림들의 집단 집회가 일어났다. 일부는 한양으로 들어와 서원 철폐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때마다 대원군은 유림들의 집회를 강제로 진압하고 유림들을 한강 건너 노랑진 밖으로 내쫓았다. 흥선 대원군은 이런 말을 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위협한다 해도 이 정책은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니, 그리 알라!"
이로 인해 유학자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대원군을 지지하던 이항로 등도 이때부터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항로의 문인 최익현은 민씨정권과 손잡고 대원군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이 대원군을 견제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은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직접 통치를 시작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출입하는 대궐 전용 출입문이 따로 있었는데 이것마저도 폐쇄시켜 버렸다. 아예 대궐 출입을 못하게 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을 떠나 양주에서 은둔하였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 뒤 다시 집권을 노렸으나 실패하고 청나라로 환송되어 4년간 유폐된 가운데 원세개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려고 하였으나 이것마저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일본 공사 미우라와 결탁하여 1894년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2. 경복궁 중건
경복궁의 중건은 헌종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서둘렀다.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였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결두세는 지금의 부가세와 같은 것이다.
또한 춤꾼과 기녀를 동원하여 경복궁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열었다. 그런데 경복궁을 중건하던 중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경복궁 중건에 쓸 제목이 모두 타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 공사를 중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대원군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더욱 독촉했다. 각 지역 왕릉 주변과 종친 무덤 가의 나무까지 벌채하고, 도성 4대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통행료인 문세를 받았다.
3. 통상거절 척화비
통상수교 거부 정책도 강경했다.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 가려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대원군의 통상거부 의지는 너무나 강경해졌다. 통상하자고 말하는 서양 사람들을 오랑캐라 하고 배척하면서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척화비 내용은 다음과 같이 간결한 문장이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고,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것이다."
4. 열강들의 위협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처형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프랑스가 이를 구실 삼아 1866년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 군을 물리쳤다. 이를 명인양요라한다.
또한 미국도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면서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 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이겨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 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넘기는 것'이라는 척화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신미양요>
1871년 (고종 8년)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침략한 사건
1873년 음력 11월,고종이 직접 정치를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민씨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외국과의 통상 개화론자들이 고개를 들면서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 고종 12년 10월 18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강화도 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렸으나 개항 찬성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1876년 2월 27일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써 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였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사한 계책을 일삼다가 1910년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일본 수신사 김홍집 등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개화정책을 전담하는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11월 13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5. 임오군란 - 별기군 차별대우
1882년 음력 8월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대우, 봉급으로 주는 미곡을 연체하고 그나마 변질된 불량미를 지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불만하고 분노하는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항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1873년 이래 대궐은 저축해 둔 쌀이 거의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개화정책으로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10년간 월급이 체불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쫓겨나게 되자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고, 열악한 재정 상황과 동시에 전임 선혜청 당상인 김보현과 당시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민겸호 댁 하인의 착복과 축재 사실이 병사들에게 드러나면서 이들은 난을 일으켰다.
이 통에 민겸호, 김보현, 흥인군까지 살해되었다. 전단 초반에는 우발적이었으나 조정이 민겸호 등을 옹호하면서 병사들의 감정은 격화되었다.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사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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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2. 새 역사 500년 - 조선 시대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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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7. 복잡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조선사) 8.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사건
(조선사) 9. 대한제국의 탄생과 멸망, 헤이그특사, 한일합방과 식민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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